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증언

정인식(鄭仁植)1) 


1956년 독립노농당의 제4차 특수전당대회 당시 같은 대학의 학우인 정태철의 적극적인 권유에 의해 입당한 후 적극적으로 당 생활을 하였다. 자유당 말기에 당에는 최갑용, 이지활, 이종완, 김영주, 이주록 선생들과 젊은 층에서는 내가 주로 상근을 하였는데 내가 경주로 내려 간 다음에는 김용관, 고범준 동지 등이 상근을 하였다.

자유당 말기, 어느날에 성남 중 고교 설립자인 김석원 장군이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 건립 추진을 위한 모임을 갖는다는 신문 보도가 있었다. 김석원 장군이 일본군 장교로서 친일을 했는데 3·1 운동의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 분인 손병희 선생의 동상을 본인이 주도하여 건립한다는 것이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굳이 할 생각이 있으면 전면에 나서지 않고 돕는 것이 친일했던 사람으로서 자숙하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미치자 건립 준비를 위한 모임 현장을 찾아갔다. 일제 장교였던 김석원 장군이 주도한다는 것은 염치없는 행위이니 당장 모임을 취소하라고 외쳤다. 모두들 웅성거리고 나의 외침에 공감하는 말들이 나왔다. 만류하는 사람들에 의해 현장에서 나왔고, 이내 당사로 가서 단주 선생께 말씀드렸더니 선생께서 나의 의기(義氣)를 칭찬하셨던 기억이 새롭다.

50년대 후반 단주 선생을 모시고 경기도 용문산을 간적이 있다. 선생께서 청년 당원들의 수련원을 지을 계획을 하시고 근거가 될 부지와 임야를 확보하려고 나서신 것이다. 시골 길의 차안에서 우연하게 신문 기자가 단주 선생을 알아 보고 인사를 하자, 선생께서는 비슷한 사람인가 보라며 짐짓 능청을 보이셨고 기자가 머리를 연신 기웃하였던 일화가 있다. 선생의 여유로움의 모습이었고, 어려운 당 활동 중에도 뒷일을 도모하려는 선생의 의지 깊은 불굴의 모습을 그날의 수행에서 또 한 번 보았다.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회고가 서로 중복되는 부분은 다른 동지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내가 특별하게 간직한 다음의 몇가지를 증언하려고 한다.


<정재용 선생의 독립노농당 입당>


기미년 3월 1일 정오 탑골 공원에서는 민족대표 33인을 위시하여 전 민족이 일제에 항거하여 이 나라의 독립을 쟁취키로 결정한 날이었다. 탑골공원에서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구름떼처럼 모인 인파로서 공원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정오까지 민족대표 33인은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당시 이들은 태화관에 있었음) 이에 이곳에 모인 민중들은 민족대표 33인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어쩔 줄을 모르고 장내는 술렁대기 시작하였다. 이때 단상에 등단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선창하여 전체 민중을 이끈 한 청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정재용 선생이시다.

1959년 늦은 봄 어느날(날짜 미상) 나는 어쩐 일인지 아침부터 몸이 무겁고 마음이 울적하여 무엇을 해야 할지 방향 감각을 잡을 수 없는 심정이었다. 이때 자유당의 독재권력은 유래없는 횡포로 전국민을 억압하여 국민은 자유없는 생활만 거듭되는 시기였다. 이날 오후 필자는 울적한 심정으로 광희동에 계시는 단주 선생을 찾았다. 단주 선생께서는 만면에 미소를 띄우시고 정군 오랜만이야 하시면서 나를 맞아 주셨다. 나는 선생으로부터 여러 가지 국내외 정세에 관한 말씀을 들었는데, “정군, 자유당은 이재 망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이것은 필연이야.” 하시면서 정국의 흐름을 예견하시었다. 그렇다고 해서 뿌리 깊은 외세 의존 세력이 함께 망하는 것이 아니므로 우리는 이에 대비를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참, 어제 정재용 씨가 나를 찾아와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어.” 하며 정재용 선생에 관한 내용을 들려주시었다. 선생의 얼굴에는 정재용 선생을 매우 좋아하는 빛이 역력 하였다. 그리고 정재용 선생의 주소도 알려주시었다. 단주 선생으로부터 정재용 선생의 주소를 듣고 보니 내가 사는 집에서 도보로 십분거리에 불과하였다.

나는 바로 그 다음날 아침 정재용 선생을 찾았다. 선생께서는 나와 초면인지라 “그대는 누구인가?” 라고 물으시기에 “저는 단주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정인식입니다.” 라고 밝혔더니 방으로 들어가자고 하시면서 서재로 안내하여 독대하게 되었다. 나는 서두에서 “저는 선생님의 내력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어제 단주 선생님으로부터 선생님에 관한 말씀을 들었습니다.” 라고 아뢰였더니 “뭐, 별일 한 것도 아닌데.” 라며 매우 겸손해 하시었다. 이에 나는 “저는 단주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몸이지만 이제 선생님의 가르침도 함께 받고 싶습니다.” 라고 고하였더니 내가 그런 능력이 있느냐며 다시 겸손해 하시었다. 나는 여러 가지 대화 끝에 “선생님께서 단주 선생과 힘을 합쳐서 큰일을 도모하신다면 저희들 청년들은 굳게 뭉쳐 선생님들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올렸더니 만면에 미소를 띄시고 대답은 없었다. 정재용 선생과 대화를 마친 나는 돌아오는 길에 나의 역할만 잘하면 정재용 선생의 입당도 가능하겠구나하는 생각을 굳히고 흐뭇한 느낌에 잠겼다. 그리고 약 1주일이 경과하였다.

나는 독립노농당의 입당원서를 지참하고 다시 정재용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재용 선생은 나를 반가이 맞아 주셨다. 선생께서는 단주 선생께서도 안녕하시냐 하고 단주 선생의 안부를 물으셨고 나도 그렇다고 대답한 후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후 나는 선생께 “지금 나라는 일촉즉발의 위기에 처해 있는데 선생님께서 빨리 단주 선생님과 힘을 합쳐서 대사를 도모해 주십시오.” 라고 말씀을 올렸더니 “나도 다음 정부통령 선거시 단주 선생과 함께 대통령이든 부통령이든 자리에 구애없이 마지막 봉사를 할 용의가 있다.” 고 말씀하시고 나의 동정을 살피는 듯 하였다. 이 때 나는 지참하고 있는 입당 원서를 선생님 앞으로 내놓으면서 “여기에 서명하여 주십시오.” 라고 요청하였더니 선생께서는 조용히 입당 원서에 서명 날인하신 후 나에게 돌려주시었다. 이로서 정재용 선생의 독립노농당 입당은 완료되었고 나는 수시로 정재용 선생의 자택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독립노농당 상임 대표 회의는 3·15 정부통령 선거에 불참키로 결의하여 선생의 큰 뜻은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고 3·15 정부통령 선거는 사상 유래없는 부정 선거로서 4·19 혁명이 일어나고 자유당 정권은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3·15 부정 선거의 결과 마산을 필두로 하여 학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이승만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데모에 돌입하게 되었다. 이 데모는 점점 세가 확산되어 4월 19일에는 서울 장안을 휩쓸게 되었다. 이에 자유당 정권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려고 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희생자를 내게 되었고 데모는 더욱 격화되었다. 데모가 갈수록 격렬해지므로 때 정재용 선생의 시국관과 이에 대처하는 견해를 듣기로 마음먹고 선생의 자택을 방문하였다.

선생께서는 나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뜻밖에도 어제 내가 한 방송을 듣고 찾아 왔느냐고 물으셨다. 나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선생께서 무슨 방송을 어떻게 하였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다. 선생을 따라 서재에 마주 앉아서 말씀하신 방송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였더니 자유당의 무한 독재에 항거하는 데모대에 계엄군과 경찰이 무차별적으로 저지하여 발생한 희생자의 구제책을 말하는 이 없으니 나라도 나서서 부상자는 국가에서 책임지고 치료하며 사망자는 응분의 보상을 하라고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요구한 것이라고 설명하시었다. 이 말을 들은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감히 누가 삼엄한 계엄령 치하에서, 그것도 그 정권을 타도하려다 희생된 자들을 위하여 응분의 조치를 요구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노지도자의 지혜와 용기에 깊이 감탄하였다. 이 밖에도 정재용 선생과 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으나 여기에 일일이 소개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독립노농당 활동의 연장-농민운동>


1961년 4월 1일 단주 선생은 한 많은 과업을 동지들에게 남겨 놓으시고 서거하셨다. 단주 선생만 따르던 나는 하늘도 땅도 다 무너진 심정이었다. 당시 고향에 계신 아버님께서는 장남인 나의 귀향을 독촉하는 서신이 계속해서 발신되었다. 나는 당시 결혼도 하지 않는 몸인지라 빨리 결혼을 시켜서 나와 가정을 안정시키려 하는 아버님의 바램이셨다. 그리하여 나도 단주 선생을 잃은 심정도 달래고 아버님의 뜻에 따라 일시 귀향하여 여태까지의 불효도 다소 씻으려고 마음먹고 4월 하순경 귀향하였다.

내가 귀향한지 얼마 되지 않아 5·16 군사 쿠테타가 일어나서 독립노농당은 해산되었으며 다수 동지들은 구속되었다. 또한 구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은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다시 상경하여 서울 생활을 해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나는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당시 농촌생활은 봄이 되면 절량 농가가 속출하고 보리고개를 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러나 나의 집은 꽤 광농이며 과수원도 경영하였다.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와 아버님을 도와서 열심히 농사짓는 모습을 보고 주변에서는 아버님을 몹시 부러워하였다. 그리고 나는 1963년 1월 3일 현재의 처와 결혼하였다. 그때 이창근 선배가 주선한 축의금을 들고 유영봉 동지가 축하차 참석하여 주었다. 그리고 나는 물불을 가리지 아니하고 열심히 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나는 꿈을 안고 단주 선생을 따랐던 몸인지라 단순히 농사만 짓는 독농가의 체질은 아니었다.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그 조직을 통하여 나의 이상을 실현해 보자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높아만 갔다. 당시 박정희 군사 정부는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3대 목표를 세우고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전력을 투구하는 상태였다. 그리하여 농촌에서도 새로운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마을마다 농촌 청소년들을 모아 4H 구락부를 조직하고 농촌 부녀자들을 모아 생활 개선 구락부, 성인 농민들을 모아 농사 개량 구락부를 조직하여 시군 단위로 연합회를 구성하고 농촌지도소가 이 조직들을 교육시켜 증산 운동에 앞장서게 하였다. 나는 체질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고 그 규합된 조직의 힘으로 뜻을 이루려는 욕망이 강하여 농사 개량 구락부 월성군 연합회의 지도급 인사들과 교류하기 시작하고 그들과 깊이 있는 사귐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그 모임에 몇 차례 참석하여 그들과의 교류를 더욱 공고히 하였다. 내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여 전 정열을 쏟은 곳은 바로 이 월성군 농사 개량 구락부 연합회였다. 이 연합회에서 나는 읍면을 순회하면서  모임에서 연설도 하고 주제 발표도 하였다. 그러던 중 회장의 임기가 끝나고 내가 연합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회장으로 당선된 나는 낮에는 일하고 밤이면 원근의 동지들을 경주 시내에 초청하여 술을 마시면서 시국담을 털어 놓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이러던 중 정부에서 각 시도 지사의 인사이동을 단행하였다. 마침 경북지사에는 군출신으로 추진력이 강하기로 이름 높은 김인 전남 지사를 경북지사로 전보 발령하였다. 야심찬 김인 지사는 경북이 박정희 대통령의 출신도이기도 한지라 큰 공을 세워 그의 정치적 활로를 확대하려고 궁리하였다. 그리하여 보리농사 대혁신운동이라는 공약을 내걸고 이를 도정의 제1목표로 삼았다.

그 방법으로서는 종래까지 재배하여 오던 재래종 보리의 30%를 쌀보리로 교체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재래식 보리와 쌀보리의 수확량이 같다 할지라도 재래식 보리는 이를 도정하면 50%의 보리쌀이 생산되고 쌀보리는 이를 도정하면 70%의 보리쌀이 생산된다는 것이다. 결국 20%의 보리쌀이 증산된다는 결론이었다. 김인 지사의 이 뜻은 좋으나 그 실천 방법이 문제였다. 전라남도에서 군량미로 비축한 쌀보리를 경상북도에 쌀보리 종자로 배정한다는 것이 김인 지사의 계획이었다. 이 계획이 발표되자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을 비롯하여 많은 농학자들은 이를 반대하고 만류하였다. 그 이유는 보리농사뿐 아니라 일반 야생 식물이라도 그 성장에 적절한 기후 풍토와 환경이 적절하여야 하는 것이지 이질적인 환경에서 실험 재배도 거치지 아니한 쌀보리 종자를 그대로 획일적으로 농가에 배정하는 것은 무리라는 이유였다. 당연한 논리이다. 그러나 공을 세우는데 급급한 김인 지사는 이를 묵살하고 강행하면서 도내 농업 관계 전공무원을 증원하여 종자의 배정에서 파종까지 감시토록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대실패였다. 대부분의 종자는 발아가 되지 아니하였고 발아가 된 종자마저 고사하는 상태였다. 이것이 김인 지사의 보리농사 대혁신 운동의 결과였다.

나는 김인 지사의 보리농사 대혁신 운동의 실패를 보고 김인 지사와 싸우기로 굳게 다짐하였다. 우선 도지사와 싸우려면 나 하나만의 힘으로는 너무 벅찬 일이라 많은 농촌 동지들을 이 투쟁 대열에 참여시키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되어 우선 농사 개량 구락부 월성군 연합회의 조직을 활용하는 방안을 강구하고 측근 동지들과 협의하였다. 이 협의에서 모두의 찬성을 얻었다. 이에 힘을 얻은 나는 모임을 확대하여 여론을 환기시키면서 구체적 방법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도지사를 상대로 투쟁하는 단체가 비록 자생단체이기는 하나 월성군 농촌지도소의 산하 단체처럼 되어 있는 농사 개량 구락부 월성군 연합회의 명칭은 부적절하다는데 의견을 모았다. 따라서 별도의 조직체를 결성키로 하였다.

그리고 그 조직의 명칭을 ‘한국농민자주연맹’이라 정하고 각 읍면 대표 10여명이 발기인이 되었다. 그리고 결성 대회는 차기 농사 개량 구락부 월성군 연합회의 총회시 총회를 마치고 그 자리에서 전격적으로 결성키로 하였다. 이렇게 합의한 나는 월성군 농촌지도 소장과 협의하여 농사 개량 구락부 월성군 연합회의 총회를 소집하였다. 이 날은 유래없이 많은 회원이 참석하였다. 총회를 마친 후 우리들은 그 자리에서 ‘한국농민자주연맹’을 결성하였다. 마침 이때 유영봉 동지가 나를 찾아와서 필자의 집에서 함께 지내는 중이라서 뜻밖에도 유영봉 동지의 축사를 받았다. ‘한국농민자주연맹’의 결성을 마친 동지 일동은 김인 경북 지사에 대한 보리농사 대혁신 운동에 대한 전방위 투쟁을 결의하고 전권위원(김재섭, 김희용, 구현봉, 도환조, 필자) 5인을 선출하고 폐회하였다. 이 때 가장 입장이 난처했던 사람은 자리를 함께 한 월성군 농촌지도소 소장이었을 것이다. 농사개량 구락부를 주관하는 공무원이 그의 상전인 도지사에 대한 투쟁 결의를 막지 못한 책임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투쟁의 만류를 체념하고 나에게 우리 농촌진흥원에서 그렇게 반대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행하더니 결국은...... 하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나를 비롯한 전권위원들은 우리 월성군의 피해액뿐 아니라 경북도내 타지역의 피해액도 조사하여 피해 총액을 보상받을 투쟁을 결의하였고 이 결의는 군과 지도소를 통하여 도지사에게 그대로 보고 되었다.

경북도에서는 일면 회유 일면 강압 등 각종 수단을 모두 동원하여 우리의 투쟁을 막으려 하였다. 그러나 이는 허사였고 우리는 타 지역의 피해 조사에 착수하였다. 어느날 김인 경북지사는 ‘한국농민자주연맹’의 투쟁으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받을 문책이 두려웠는지 아니면 우리 자주연맹이 두려웠는지 긴급자금으로 쌀보리 종자 대금 전액을 보상토록하고 이 자금을 각 읍면까지 긴급 배정하였다. 실정한 정부가 농민의 자주적 항거에 굴복하여 결국 이를 보상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는 후문이었고, 나는 단주 선생의 가르침과 독립노농당 활동의 연장이라고 생각한 이 투쟁을 잊지 못한다.


<박석홍 선생에 대한 소회>


박석홍 선생은 경북 의성군 비안면 이두리에 계신 분으로 일제가 이 나라를 강점하자 분연히 일어나서 조국 광복을 위하여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로 망명하시어 독립투쟁을 하신 투사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조국의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국민의회의 핵심인물로서 단주 선생과 함께 독립노농당을 창당하신 후 남조선 단독 정부 수립의 반대, 통일 정부의 수립 투쟁, 외세의 배격 등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 항상 앞장서신 분으로 단주 선생 서거 후 독립노농당의 대표로서 당을 이끌어 오던 중 5·16 군사 쿠데타로 독립노농당이 해산됨으로서 그의 정치력을 마음껏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나는 여기에서 박석홍 선생의 화려하면서도 험난하였을 약력을 일일이 소개하는데 그 뜻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를 생략하고 다만 박석홍 선생과 나 사이에 있었던 잊지 못할 아쉬움과 추억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나는 1962년 4월 1일 단주선생께서 서거하신 후 그 달 말경 일시적으로 낙향하여 집안일을 좀 돕는다는 것이 고향에서 5·16을 만나 세상이 바뀌고 당은 해산되었으므로 급히 상경하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따라서 고향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여태까지 하지 못한 부모님에 대한 불성실한 생활도 일시나마 고치려고 마음을 정하였다.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새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 군사 정부는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전면적으로 금지시켜 놓고 그들만 암암리에 정당을 조직하여 왔다. 군사 정부의 이 작업이 완료된 후 다시 정치활동을 재개시켰다. 군사 정부가 조직한 이 비대한 조직이 바로 민주공화당이다.

하루는 뜻밖에도 박석홍 선생이 이 민주공화당의 상임공문으로 취임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서울의 이창근 선배에게 전화로 확인하니 사실이었다. 그로부터 약 10여 년간 나는 박석홍 선생을 만나지 못하였다. 해마다 4월 1일에 거행되는 단주선생의 추모식에도 박선생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1974년, 경주에서 신라산업주식회사라는 법인체를 설립하고 종합면류 공장을 건립하였다. 꽤 큰 규모의 중소기업체였다. 나는 이 공장을 설립한 후 경상북도 면제조공업협동조합의 총회에서 이사장으로 당선되었다. 경북면조합의 사무소는 대구에 소재하였으므로 나는 대구에 가는 길이 잦았다. 대구에 가게 되면 조합의 업무를 마친 후 주로 남서순 동지와 만나 박주일배를 하면서 푸념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이러던 중 1975년 9월 하순경 경북 의성군 안계읍에 상인들이 합동하여 내공장의 제품(거북선표 국수)한 트럭을 주문한 일이 있었다. 경주에서 안계로 가려면 박석홍 선생이 사시는 의성군 비안면 이두리를 거쳐서 가야 한다. 나는 이 기회에 박석홍 선생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기로 작정하였다. 박석홍 선생께 드릴 국수 한 박스를 별도로 포장한 후 안계로 물품 배달을 하는 차에 탔다. 그리고 주문된 제품의 배달을 마치고 박석홍 선생의 댁을 방문하였다. 나는 평소 박선생을 매우 존경하였고 박선생도 나를 매우 사랑하여 주시었다. 그러나 5·16이후 10여 년간 단 한번의 만남도 없었던 박선생인지라 매우 설래는 심정이었다.

나를 보고 선생께서는 매우 반갑게 맞아 주시었다. 곧 이어 주안상이 나오고 술을 마시면서 10여 년간 적조했던 심정을 토로하다가 박선생을 향하여 직설적으로 서운했던 말씀을 올렸다. “선생님께서는 단주 선생님 서거 후 독립노농당의 당수였습니다.” 라고 말하고는 “5·16으로 인하여 당은 해산되었으니 선생님의 거취에 대하여 정치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누구하나 책임을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 날 이념을 같이 하여 함께 정당을 했던 동지들이 건재한 데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이질적인 정당인 민주공화당의 상임 고문으로 취임하시었습니까?” 라고 따갑게 말씀을 드렸더니 선생께서는 구차한 변명을 하시지 않았다. “선생님의 이러한 거취에 대하여 많은 동지들은 지난날 선생님을 존경하였던 심정을 철회하였거나 감소시켰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지난날 선생님의 사랑을 받아왔던 후학으로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라고 말씀드렸더니 “정동지, 미안하네.” 라고 말씀하시고 다른 말씀은 없었다. 그리고 “기왕에 상임고문으로 추대되었으면 각 지구당별로 한 사람씩 선생님의 친위대를 발탁하여 그들을 공천토록 영향력을 발휘하여 세력을 구축하는 것이 혁명가의 기질이 아닙니까?” 하고 평소 나의 심중에 있던 생각을 그대로 말씀드렸더니 박선생께서는 이때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렇게 박선생께 무례할 정도로 공격적인 발언을 한 나의 심정 또한 송구함을 금치 못하였다.

이러는 동안 서로 술이 거나하게 취하였고 하직할 시간이 되었다고 판단하여 인사를 고하였더니 “정 동지, 참으로 오랜만인데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나 하지.” 하며 권유하시는 것을 사양하고 일어서는데 마침 박선생께서 거처하는 방벽에 걸린 대형사진 하나를 발견하였다. 단주 선생의 사진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단주 선생님의 사진이 아닙니까?” 하고 말씀드렸더니 그렇다고 말씀하시고 “이 사진은 항상 여기에 있었어.” 라고 대답하셨다. 아쉽게도 나는 박선생께서 단주 선생의 사진을 항상 걸어둔 심정을 묻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박선생 댁을 더 이상 방문하지 못하여 이것이 최후의 만남이 되었고 선생께서 유명을 달리 하신 후 조문도 못 올리고 타인을 통해서 소식만 들었다. 아직도 박선생으로부터 평생 동안 단주 선생의 사진을 걸어둔 깊은 뜻을 듣지 못한 것이 아쉽다.

단주 선생에 대한 회고와 추모

 김용관(金容寬)2)


1957년도 8월 중순.

죽마고우인 정태철(鄭泰哲)의 주선으로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청년부장 유제충(柳濟忠)을 소개 받았습니다. 친구인 고범준(高範濬)과 같이 안성읍(安城邑) 모다실에서 독노당(獨勞黨)의 정강정책(政綱政策) 및 노선(路線)에 대하여, 그리고 상호부조론(相互扶助論)에 대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아울러 단주유림선생(旦洲柳林先生)의 출생(出生)과 정치사상(政治思想) 대하여 말씀을 들었습니다.

1957년 11월 초순.

상경(上京)하여 유부장(柳部長)의 안내를 받아 중앙당(中央黨) 사무실(事務室)에서 유림선생(柳林先生)께 고범준(高範濬)과 같이 첫 인사를 드리고. 그 다음날 고범준(高範濬)과 같이 입당(入黨)할 것을 결심, 절차에 의하여 입당(入黨)하게 되었습니다.

1958년 애국(愛國) 애족(愛族) 애당(愛)의 정신(情神)으로 당사(堂舍)를 지키자는 명분(名分)으로 몇몇 젊은 동지(同志)들과 열과 성을 다하여 당활동을 하였습니다. 사무실 책상을 침대삼아 잠을 자며 청계천변 포장마차에 50환 짜리 수제비로 끼니를 해결할 때 각지방에서 올라오는 동지들을 비롯하여 많은 동지들의 위로(慰勞)와 격려(激勵)가 힘이 되었으며 그때의 기억이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1960년 6월 하순.

7 29 총선에 선생(先生)께서 안동(安東)에서 출마(出馬)하자, 조순기 한상섭 고범준 주경희 동지외 수 명이 현지에 내려가 선거운동(選擧運動)을 하였습니다.

1960년 선생(先生)께서 고혈압 관계로 서울대학병원에 입원 중에 계실 때 민주당(民主黨)으로부터의 총선 승리 자축연(장소: 구 반도호텔)에 초청을 받고서, 참석할 것을 어렵게 결정하시었는데, 교동차편도 여의치 않아 일반 영업용 택시로 모시고 수행하였습니다. 연회장에서 장면(張勉),윤보선 씨외(尹潽善氏外) 각계인사 몇 명을 만나고 잠시 머무시다가 곧바로 나오셨는데 수행하면서 무언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하였습니다.

1961년, 이천(利川) 보선에 이천재(李天宰)씨가 출마(出馬)할 때의 일입니다. 중앙당(中央黨)의 소유(所有) 비품인 확성기 일습을 당(黨)의 ‘공식(公式)’ 승낙도 없이 가져가 자기(自己) 선거운동에 사용하고 있음을 선생(先生)께서 확인하시고 당장 회수 조치하라는 명(命)을 하시면서 “왜 이천재(李天宰)는 매사에 행동이 불분명하고 정확하지 못한가?” 하고 대단한 진노와 질책이 있으셨습니다. 그 명(命)을 받고 김수찬(金洙燦) 동지(同志)가 즉시 회수 처리하였습니다.

1961년 4월 1일, 오늘 5당(黨) 통합회의(統合會議)가 있음을 보고 드리고 고범준 동지(高範濬 同志)와 같이 회의장에 도착하였습니다. 회의장에는 정인식, 이창근, 유성하 동지 등 여럿이 함께 있었습니다. 회의 시작한지 얼마 안된 시간에 제기동 선생(先生)의 가정(家政) 비서인 이정희(李貞姬)씨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내용인즉 선생(先生)께서 혈압으로 쓰러지셨다는 급보(急報)여서 회의(會議)를 중단(中斷)하고 모두가 제기동으로 급히 와서 타계(他界)하셨음을 확인(確認)하였습니다. 삼선교의 아들 원식(原植)씨 집으로 운구하고 7일(七日)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葬禮)를 지냈습니다.

1961년 5월

5·16 군사(軍事) 쿠테타로 당(黨)이 강제해휴(强制解休)되고 많은 동지(同志)들이 투옥(投獄)되었으나, 나는 때마침 급한 개인사정으로 당사 밖에 있었으므로 투옥을 모면하였습니다. 그로부터 투옥(投獄)된 동지(同志)들의 옥바라지를 나름대로 용감하게 열심히 하였습니다. 그당시 유세희 씨도 학생운동 때문에 투옥되었는데 그 어머니인 광식 씨 부인이 면회소에서 아들을 기다리며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자주 뵐 수 있었습니다.

1961년 8월 말경, 일동(一東)으로 피신 은거생활(隱居生活)을 하였습니다.

1962년 2월 중순, 조용히 상경(上京)하여 모(某) 식품회사에서 계속 은신(隱身)하다가, 소위 정치(政治) 정화법(淨化法)이 해체되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4월 1일 단주유림선생(旦州柳林先生) 1주기(一周忌) 추도식(追悼式)때 아들 원식(原植)씨가 당(黨) 동지(同志)들을 무시하고 쿠데타 세력 중심으로 행사를 했을 뿐 아니라 마음대로 경비책임자를 김두한 씨(全斗漢氏)로 정(定) 하고 점심 준비를 하면서 서울 장안의 여급(女給)들을 일정한 까운을 입혀 동원시켰습니다. 추도식(追悼式) 행사장(行事場)의 분위기가 왠지 낯설고 어색하여 우리 동지(同志)들은 한곳에 따로 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느닷없이 김두한 씨가 동원한 경호원이 조용히 하라고 소리치며 다가 왔습니다. 언쟁이 일어나자 김두한씨(金斗漢氏)가 달려 왔는데 와서 보니 과거 노농청년연맹(勞農靑年聯盟)에서 고생하며 같이 활동하던 동지(同志)들이었습니다. 유원식씨(柳原植氏)의 잘못된 처사에 대하여 김시택(金時澤) 동지(同志)가 여러 가지로 말하니 김두한씨(金斗漢氏)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고 하면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함께 활동했던 동지들이 당 해산 후 뿔뿔이 흩어지고 단주선생의 1주기 추모식에 모이니 비감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었습니다.

단주선생 사후 독립노농당이 해체되고 속수무책으로 시간만 흘려보냈습니다. 젊은 날 단주선생을 모시고 독립노농당을 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 기쁨만큼 선생의 뜻을 얼마나 계승하였나 하는 아쉬움과 자책이 이제 너무도 큽니다.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에 대한 회고

조순기(趙順基)3)


경북 영양에서 서울에 상경하여 유광식(柳廣植) 씨가 처이모부가 됨으로 그 집에서 기거한 관계로 자연스럽게 입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광식 씨의 2남인 유세희 교수와 같이 기거하였는데 단주 선생께서 조카인 유광식 씨 댁에 오실때 인사를 드렸고, 그 후로 광희동, 제기동 집에 자주 찾아가서 뵙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결국 독립노농당에는 1956년 6월 27일 입당하였습니다.

단주 선생께서 1958년도에 대구에서 출마시 방한상, 유창훈, 정지호, 남서순외 여러 동지와 같이 선거기간 동안 선거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당시 서상일씨가 단주 선생에게 찾아왔으나 단주 선생께서 친일파라며 호통을 치셨다는 일화가 기억에 남습니다.

특히 단주 선생께서 4·19후 안동에서 출마시 김용관, 유명걸, 유창훈, 주경희외 여러 동지와 함께했던 선거운동은 힘들었던 만큼 기억이 많이 남습니다.

임하 국민학교에서 주경희 동지가 단주 선생에 대한 찬조 연설을 하였습니다. 여성동지의 열성에 단주 선생도 찬조연설을 허락하셨지만 안동이라는 지역의 특수성이 양반과 상민의 구별, 남자와 여자의 구별등이 유달리 심한 곳이라서 여성의 찬조연설은 득표면에서는 역효과를 냈습니다. 지역적인 특수성을 이용한 상대후보들의 흑색선전과 선동도 매우 심하였습니다. 우리들 조상들 무덤을 헤치고 살펴보면 뼈에 양반들에게 곤장을 맞아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있을 것이라며 그때까지도 남아있는 반상의 의식을 이용해서 양반 출신인 유림에 대한 은연중 비난과 상민들의 후예들에게 계급갈등을 조장하여 표를 얻지 못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반면에 유림은 아나키스트이고 아나키스트는 빨갱이 4촌이라는 흑색선전도 있어서 사상적인 색깔론이 들먹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상대후보들의 흑색선전이 심했지만 그 당시 도의원이었던 김시박씨는 단주 선생을 찾아와서 독립운동자가 출마하니 내가 사퇴하는 것이 도리라며 인사를 한 적도 있으나 그와 같은 집안인 김구직 씨는 그보다 득표력이 없으면서도 안동에서의 대성인 집안표를 받고 출마를 하였습니다. 대구에서의 선거 운동보다도 안동에서의 선거 운동은 궁벽한 시골이고 지역이 넓어 선거 운동이 더욱 고되었습니다. 김용관 동지와 한조가 되어 임하면 전체를 샅샅이 훑으면서 선거 운동을 하였는데 한두 채 있는 산간 외딴집까지 일일이 방문하였습니다.

유세희씨를 비롯한 4·19혁명을 주동했던 서울대 학생들이 안동까지 내려와서 단주 선생의 선거 운동을 돕던 일도 기억이 남습니다. 단주 선생께서 4·19직후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모아놓고 강연을 하여 커다란 호응을 얻었는데 막상 선거유세 때는 일반 대중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연설 내용이라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내용을 유세 내용으로 하자고 건의한 적도 있습니다.

58년 대구 선거나, 60년 안동 선거 모두 자금력이 상대 후보보다 절대 열세여서 힘들었으며 그마저도 단주 선생의 조카인 유광식 씨가 어려운 와중에 선거 자금을 조달해서 겨우 지탱하였던 사실도 기억합니다. 자금의 절대적인 열세를 오직 당원들의 열성으로 메워 나갔으나 막상 선거에 실패하니, 선생과 당원들의 노력이 안타까왔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 한편으로는 국회의원이 단주 선생께 무슨 대수였겠느냐며 스스로 위안을 삼기도 하였습니다. 또 이승만 대통령이 단주 선생에게 국무총리직을 맡기려 했다는 일화를 듣고 수락하여 이대통령 측근의 모리배들을 물리치고 정치를 똑바로 하게끔 인도하였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단주 선생의 사상과 성품이 이승만 대통령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부질없다는 점도 깨닫게 됩니다.

단주 선생이 안타깝게 돌아가신 뒤 중앙당 상공부장을 맡아 당의 전열을 추스리려고 노력하던 중 5·16 쿠테타로 독립노농당이 강제로 해산되고 나 또한 정치정화법의 적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62년도 정치정화법이 해제되었으나 더 이상 다른 정당에 관여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동지들이 모여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고 그 자료집을 편찬할 때 자료수집과 편집, 교정등을 맡아 일을 하며 젊은 날의 기억을 더듬을 때 감회가 새로왔습니다. 단주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50여년 가까이 흘렀으나 선생에 대한 추모의 정이 더욱 깊어 갑니다.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의 역사적 의미

이춘희(李春熙)4)


54년도 가을에 군에서 제대한 후 군대 동기인 정태철씨를 통해 황빈씨를 알게 되었고 황빈씨가 유제충씨를 소개하여 입당하였다. 정태철씨는 경희대에 재학중에 입대하였는데 경희대 출신들이 독립노농당에는 많았다. 정태철씨는 군에 복무 중일때도 군내 웅변대회에도 입상할 정도로 매사에 적극적이었는데, 정치적 의욕도 넘쳤던 그에 의해 독립노농당을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친일파가 득실거리는 현 시국을 타파하고 이북 김일성 집단에 확실하게 대항하며, 그러면서도 모두가 같이 살겠다는 제3세력, 사회주의적 지향점을 가진 정당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 점에서 유림 선생은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서의 상징성이 있었고 그러므로 친일파 숙청에 적극적일 것이고 아나키즘 정당이 제3의 노선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독립노농당에 입당하여 활동하던 중 구국청년동지회라는 단체의 결성혐의로 특무대에 끌려가 김창용에게 직접 고문을 당했다. 유림 선생이 조봉암 및 신익희 등과 만났다고만 대답하라고 강요받았는데 끝내 죽을 각오로 버텼다. 만약 굴복했다면 이승만과 특무대가 독립노농당과 유림 선생을 정부 전복 혐의로 묶어 세웠을 것이다. 이때가 1955년 5월 초순경이었고 약 3달정도 불법적으로 감금되어 고문을 당했다. 정태철, 이춘희, 한상석, 이천재 등 독립노농당 당원과 당외의 성창훈 등 좌익성향의 몇몇 인물들이 관련 되었지만, 이 사건의 거의 대부분 관련자들은 독립노농당 당원이었으며 유림 선생에 대한 표적 공작의 일환이었다.

58년도 국회의원선거에 유제충씨가 안성에서 출마하였는데 나는 그를 도우러 내려갔으나, 정작 안성이 고향인 김용관 동지는 대구로 가서 당수인 유림 선생을 도왔다. 당수가 출마했는데 돕지 않으면 어떻하느냐는 김용관 동지의 충정이었다. 안성의 선거에서 나름대로 힘을 쏟았지만 결국 낙선했다. 선거의 패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도 선거구를 잘못 택했다는 것이다 천안에서 유제충씨가 출마했더라면 그의 아버지 유우석 선생이 출마도 했었고 유관순 열사가 유우석 선생의 친동생이니 지역적인 선거 화제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유우석 선생께서 천안에서 선거에 출마하였다가 실패하였던 점이 유제충씨에게 오히려 자신감을 못 주었다. 선거라는 것은 쟁점과 화제가 있어야 되므로 이승만 정권의 실정과 이로 인해 민심이반을 부각시키고 친일파가 아직도 건재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독립노농당의 당수인 유림 선생이 독립운동가이자 임시정부 요인인 점, 그리고 유재충씨 본인과 유관순열사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부각시킨다면 그 당시 자유당 말기의 폭압적 상황에서 오히려 선거에 유리하였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크다.

독립노농당의 선명한 이미지는 삼일독립선언서 낭독자인 정재용선생, 청주의 의병대장 한봉수선생, 천도교의 최고 원로인 이동락선생 등이 1956년도 5월에 입당한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나 또한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단주 선생이 당수라는 점이 가장 인상이 깊어서 입당했으니 말이다.

1956년도 9월부터 서울지역의 독립노농당 청년과 학생들이 서울 특수위원회를 결성하여 활동하였는데 유제충씨가 전체 책임자였다. 서울대학의 이재각, 연세대학의 오방환, 고려대학의 이두연, 성균관대학의 김남훈, 동국대학의 오연환, 단국대학의 한상섭, 중앙대학의 이상민, 홍익대학의 성창훈, 건국대학의 맹의재, 경희대학의 정인식, 정태철 등이 각 대학책임자 였고 특히, 경희대학의 조직력이 가장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독립노농당의 서울특수위원회는 청년, 학생들의 조직체로서 그 위력과 자신감들이 대단했었다. 대학외 청년들의 중심이 유영봉, 김용관, 이춘희, 고범준, 이천재 등 이었는데 특히 유영봉 동지는 민주당 강원도당의 간부로서 그 당시 김대중씨 보다도 민주당내 서열이 놓아서 정치적인 장래가 기대되었으나 독립노농당의 노선에 공감하여 보수에서 혁신으로 말을 갈아타는 경우가 되었다. 유영봉 동지의 입당에도 임동근 씨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유제충 씨와 유우석 선생이 독립노농당에 많이 기여했고 나 또한 유제충 씨의 선거를 도울 정도 가까운 사이였으나 당이 강제 해산된 후 그가 공화당에 잠시나마 입당하였을 때 유제충 씨에게 절교 선언을 했다. 공화당에의 입당은 임영신 여사가 여자국민당 당수일 때 유제충 씨의 어머니가 부당수로 있었던 점이 연결고리가 되었다. 임영신씨의 강력한 추천으로 민주공화당에 불과 며칠, 아주 잠시 있다가 곧 탈당했지만 내가 보기에는 어쨌거나 그의 행위는 독립노농당의 노선을 이탈한 것이다. 독립노농당이 비록 강제 해산되었지만 당원으로서 당의 노선과 전혀 반대의 군사 쿠테타 정당에 잠시라도 가담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적인 정리가 가슴 아팠으나 독립노농당이라는 정당의 일원이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내가 독립노농당에 입당한 것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명분있는 정당이 독립노농당 뿐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임시정부가 대한민국의 정통성내지 정체성의 뿌리여야 한다는 평소 내 생각에 비추어볼 때 임시정부 국무위원인 단주 선생의 독립노농당이야 말로 여기에 합당한 정당이었다. 그리고 아나키즘에 입각한 정당이므로 김일성과 대항할 수 있으면서 부조리한 사회를 뒤엎고 사회혁명을 완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나는 언제나 유림 선생께서 이승만씨를 넘어서는 대통령이 되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이제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의 모습은 오래전에 사라졌으나 그 흔적을 일궈서 통일된 대한민국을 건설하고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방편으로 삼는다면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이 그 의미를 비로서 찾는 것이다. 반드시 그렇게 되는 것이 나와 동지들의 간절한 바램이다.

단주 선생과 독립노농당의 회고

     이창근(李昌根)5)


이전 동지와 함께 48년도에 독립노농당에 입당하였습니다. 단주 선생을 모시고 독립노농당에서 활동한지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단주 선생께서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재정적으로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으나 항상 당당하고 자신에 찬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불굴의 투지로 절대 물러섬이 없었던 선생의 기개는 자신에게도 엄격했으며 아드님과의 일화는 널리 알려진 터이니 그렇다 치고 불의와 술수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잘못된 일에 대해 대해서, 또 부정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준엄하게 질타하시곤 했습니다. 대통령이하 이 땅에서 활개치던 정의롭지 못한 이들에 대해 단주 선생의 매서운 독설을 피한 이들은 없습니다. 때로는 그러한 엄정함과 자신감이 다른 사람들을 위축시키기도 하였으나 당신 스스로의 절제와 올바름이, 대세를 보는 막힘없는 논리가 오히려 선생의 모습을 돋보이게 했으며 항상 어느 자리에서건 좌중을 압도하였고 거기에 대항하는 경우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엄정함만이 아니라 때로는 소탈하고 유머감각도 있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조소앙 선생, 김성숙 선생이나 김학규 장군이 선생께 자주 찾아왔었는데 그분들과의 대화도중에 농담과 요즘식으로 하면 유머감각이 매우 있으셨던 것을 기억합니다. 단주 선생은 술자석을 비롯한 개인적인 자리에서도 그런 면을 보여 주시곤 했습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시던 때의 일화를 선생께서 들려 주셨는데 선생께서 의정원 의원으로 있으시고 국무위원에 선임되시기 직전, 당시에 김구 선생의 한독당이 중심인지라 단주 선생의 사상적인 문제에 대한 이질감으로 국무위원직 배분에 뜻이 모아지지 않은 것을 의정원회의 석상에서 2시간 이상이나 발언을하며 사상적인 편견과 무지함을 격렬하게 공박하였다고 합니다. 또한 국무위원으로 활동하실 때, 국무회의 석상에서 당시 외무부장이던 소앙 선생이 단주 선생에게 전보지를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불어로 씌여 있는 듯하다며 소앙이 단주에게 1주일 전에 받았다는 전보지를 내민 것을 그 자리에서 읽어보니 프랑스의 드골망명정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승인한다는 외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항이었답니다. 서로 간에 실권이 없는 망명정부지만 적과 투쟁하는 국제 공동연대의 외교적 성취이므로 그 의미가 자못 컸던 것입니다. 국무위원들 모두가 일어나서 만세를 불렀다고 합니다. 선생께서는 임시정부 제35차 의회에서 임시헌장수개안을 제출하여 통과시켰다고도 합니다.

독립노농당의 창당 후 당 기관지인 ‘노농신문’을 격주로 발행하여 단주 선생께서 많은 글을 기고하셨습니다. ‘노농신문’의 공보처 납본과 각 지방당부, 일본특별당부에 대한 발송을 노명일, 조국선 동지가 주로 담당하였는데 지금 한 부도 남아있지 않아 안타깝습니다. 6·25 동란 당시 당의 기밀사항과 서류 등을 항아리 속에 넣어 땅에 묻고 피난하였는데 수복 후 돌아와 보니 당의 나무인장만 물먹은 상태로 남아 있었고 자료를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단주 선생께서 파리 아나키스트 세계대회에 초청받아 아나키즘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겠다고 기대가 크셨습니다. 이때 당의 우한용씨가 김효석 내무부장관을 만나 단주 선생의 여권이 왜 안나오느냐고 따졌더니 장관 왈 걱정하지 말라고 당장 내드리겠다고 하여 모두들 별 문제없으려니 하였는데 왠 영문인지 차일피일 여권발급이 지연되어 결국 선생께서 출국을 못하여 모두들 안타까워하였습니다.

6·25 사변이 일어나자 소앙 선생이 6월 26일 단주 선생께 전황을 알려왔고 27일에는 그 동생되는 조시원씨를 보내 재차상황을 알려왔는데 정작 소앙 선생 자신은 피난을 못가고 납북되셨습니다. 벌써 26일~27일에는 필동 독립노농당 당사 3층에서 의정부 쪽을 바라보면 포성이 들리곤 했습니다. 소앙비서인 김흥곤이 임정요인의 납북에 대부분 관련이 있었고 그는 공산당이 심어논 간첩이라는 애기가 있었습니다. 역사 공부하는 이강민씨가 전황이 궁금하여 소앙을 만나러 갔더니 소앙이 아무말 하지 말고 빨리 피하라며 자신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다급하게 말했다고 하는데 이때 이미 소앙의 주변에 감시가 있었다는 겁니다. 피난당시 단주 선생을 대전까지는 최문호 동지가 수행하였고 대전부터는 이전 동지가 수행하였는데, 당시 대전의 춤남도청에서 조선민주당 부당수인 이윤영씨를 만나게 되니 이윤영씨가 임정국무위원 중에서 유일하게 피난오셨다고 매우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피난 당시 선생을 모시던 이전 동지가 의용대를 조직하여 김일성의 남침에 대항하자고 건의 하였는데 선생께서는 인민군 점령지에 많은 동지들이 있어 탄압을 받을 것이고 동족상잔의 비극에 더 이상 관여 할 수 없다고 하셨답니다. 또한 부산 피난 당시 이승만의 수도 서울 거짓방송을 비판하다가 강제 구금되어 형무소에 갇힌후 반 김일성 성명요구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단주 선생은 정치적으로 이승만에게 악용될 것을 우려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단주 선생의 신념은 김일성의 남침도, 이승만의 무능력과 정치적 야욕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서상일씨의 국제구락부사건 당시 단주 선생은 범국민적 민중조직을 만들어서 조직적으로 이승만 정권에 대항해야 한다며 명망가나 국회의원 몇명의 개별 행동은 의미가 없다고 참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나 심산 감창숙 선생과 성재 이시영 선생은 단주가 참여하였느냐고 확인하였는데 서상일씨가 단주 선생도 참여하기로 하였다고 거짓으로 이야기 한 바 결국 그말을 믿고 두분이 서명하였다가 나중에 이승만 정권에 곤혹을 치른 적이 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단주 선생께서 당신의 말을 실천하여 옮기려고 신익희, 장면 두 분과 주로 상의하여 ‘한국민주주의자 총연맹’을 발기 하셨는데 이때 신익희 선생과 장면 박사에게 저와 신기초 동지가 주로 연락을 담당하고 선생의 심부름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선생께서는 국회의원 몇 명의 힘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며 이승만이 권력의 힘으로 탄압할 것이고 그래도 안되면 돈으로 매수할 것이며 그래도 안되면 죽음까지 몰고 갈 것이라며 국회 내에서의 다수가 반 이승만진영이라도 그의 권모술수에 못당할 것이라고 하였는데, 그 이후에 사사오입 개헌이나 조봉암 사형 등 정치적인 해괴한 짓이 단주 선생의 예언대로 진행되었습니다.

한국민주주의자 총연맹 발기시 조봉암씨가 박기출, 김찬, 김일사 등을 보내와 단주, 해공, 장면 박사에게 참여의사를 타진하였습니다. 이때 장면 박사가 며칠 생각할 여유를 달라고 하였는데 결국 3일후 장면씨가 반대해서 조봉암씨가 참여를 못했습니다. 장면박사가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은 그가 카톨릭 신자이므로 로마 법왕청 대사에게 상의하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하고 단주께서는 추측하셨습니다.

단주께서 서울로 올라오시기 전 즉, 대구에 계실 때 심산 김창숙 선생께서 대구에 내려오셔서 단주와 술을 드시는데 이갑성씨와 서상일씨가 단주를 만나려고 두 분이 계신 술집에 와서 뵙기를 청했으나 단주께서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과거 경력 때문이었지요.

6·25 동란이 끝나고 서울에 들어와 보니 필동의 독립노농당 그 커다란 건물이 자유당 간부인 홍창섭이에게 넘어갔고 대구연합당부 당사인 북성로 당사도 친 이승만 계열인사인 김선에게로 넘어간 것을 생각하면 이승만 정권의 상식이하의 폭압에 분노하게 됩니다.

단주 선생과 아들 원식씨와의 관계를 들춰서 뭘 할까마는 선생이 원식씨를 크게 칭찬한 부분이 있습니다. 선생이 만주에서 대학예과 수준의 학교인 의성숙을 경영할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몰려와 선생의 목숨을 노리고 습격하였는데 원식씨가 그 많은 인원을 혼자서 용감하게 감당하여 무사했다는 겁니다.

백범 선생의 평양 방문이후 단주 선생과, 백범사이의 정치적 노선이 크게 엇나갔는데 그전에는 백범에게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반드시 한밤중이라도 단주 선생께 상의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범이 암살당하고 장례식때 단주 선생께서 백범의 약력보고를 하며 혁명의 길을 같이 걸었던 백범을 애도하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단주 선생을 모시면서 많은 일화가 있으나 대부분 다른 동지들과 겹치는 대목이 많을 것입니다. 제가 입당할 당시만 해도 벌써 독립노농당의 맹렬히 활동을 한 인재들이 남한단독선거에 참여하여 제명당한 뒤라서 당의 활동이 현저하게 위축되었습니다. 그래도 단주 선생은 항상 낙관적 혁명가 이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언제나 자신감이 넘치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이 나라가 통일단계에 이르면 당신의 논리가 기필코 소용되고 또한 정치적 포부의 실현이 반드시 오리라고 확신 하셨습니다. 이제 단주 선생께서 타개하신지 오랜시간이 흘렀는데 선생의 큰 뜻을 남아있는 우리들이 세상에 널리 알리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단주(旦洲) 유림선생(柳林先生)의 회억(回憶)

유창훈(柳昌勳)6)


단주선생을 처음 뵈옵기는 1946년 겨울 내 나이 17살 때 서울 필동 독립노농당 당사에서 였습니다. 일경 류주희선생의 인도로 노명일씨의 안내를 받았습니다. 당시 선생께서는 53세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중국에 계시다가 전년 입국하셔서 국민의 존경과 기대가 컸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연(偉然)한 풍모와 해박한 식견으로 세인을 놀라게 할 때 였습니다. 처음 뵈옵고 속으로 우리 문중에도 이렇게 훌륭한 어른이 계신 것을 기쁨과 자랑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당의 구비된 체제를 구경하고 내심 흠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향하였습니다.

두 번째 단주선생을 뵈옵기는 1952년 3월 대구시 북성로 1가에 있는 독노당 대구연합당부 3층에서였으며, 그 때도 역시 유일한 비서 노명일씨의 안내로 조그만 숯화로가 하나 놓여 있는 춥고 넓다란 다다미 방에서였습니다. 선생의 기골(氣骨)은 여전하였습니다. 이어서 곧 옆방에 있는 하기락(河岐洛)(당시 경북대 교수)선생, 유명종(劉明鍾), 채수한(蔡洙翰)(당시 경북대 3학년)씨 등과 인사를 나누었으며 나의 정신적인 세계에 새로운 천지가 전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나는 거의 매일 선생을 뵈옵고 그 독특한 정치이론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편 소위 아나키즘에 관한 책을 열심히 읽었으니 「상호부조론」,「유일자와 그 소유」,「신과 국가」,「폭력론」,「전원일터 공장」,「무정부주의와 근대과학」등이었습니다.

그 때 이승만 정권에서는 저 유명한 부산 정치파동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선생께서는 만나는 사람마다에 이승만씨의 정치이념의 빈곤(貧困)과 독재(獨裁)를 비방하여 갖은 욕설(辱說)을 퍼부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씨를 정면으로 거리낌 없이 비난하던 선생의 대담성이 측근에 있는 우리들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나를 조용히 불러서는 “내가 이승만이를 욕하는 것과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단 말이야. 무슨 소리를 하여도 이승만이가 대한민국에 제일인자인 것만은 시인해야 돼, 턱없이 다른 놈들이 뭐라고 떠들어도 감히 그 앞에서는 고개가 올라가지를 못해, 어림없지 동암(東庵), 유석(維石), 해공(海公), 죽산(竹山) 등 그 까짓것들 변절자 애숭이들이 어떻게 고개가 올라갈 수 있단 말인가. 뭐니뭐니 해도 저들이 변절할 때 그는 독립운동을 하였고 저들이 기어 다닐때 벌써 그는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뭐가 큰소리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몰라도 분수가 있어야지, 이것 도무지 뭐가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함부로 날뛰지만 될게 아무것도 없는거야.

그런데 이승만이란 놈이 조금만 더 잘하면 오죽 좋으랴만 저렇게 천하에 못된 짓만 찾아가면서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꼴이야. 더욱이 그 밑에 있는 놈들이란 모조리 친일파 민족반역자 모리배들이 모여서 갖은 잔학을 다하고 있으니 그저 그놈들 민주역적 소인들을 이잡듯이 모조리 목아지를 잘라야 해.

그즈음 선생의 생계는 극도로 곤궁하여 식모도 변변히 못 두시고 (식모가 들어와도 굶다 못하여 몇칠을 못가서 가버리기 일쑤였다.) 하루에 한 두끼를 손수 지어 자시니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습니다. 하도 딱하여 주머니에 푼전이 생기면 도청(옛 청사 포정동) 앞에 있는 개장국집에 간혹 뫼신 적이 있었는데 선생은 그 때마다 요리영양학을 강(講)하시어 요리사(이다바)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저녁에 가보니 손수 나물만 넣어서 국을 끓여 잡수시길래

“할아버지 그러시지 말고 절에나 가 계시면서 휴양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더니 “걱정마라. 이래뵈도 80은 문제없으니 내가 본디 혈압이 높아 나물이 내게는 좋거든. 절에 가도 좋지만 그러면 세상 사람이 이제 완전히 도피(逃避)하였다고 치부를 할 것이니 그러면 큰일이지. 내 평생의 일이 굶는 것과 싸우는 것인데 어찌 안일(安逸)을 구하여 절에 간단 말인가? 하는 것 없이 뵈어도 굶으면서 이 방을 지키고 문간에 거미줄이 치어도 다 의미는 있는 거야.”

하시면서 국물을 마시던 것이었습니다. 선생의 굶기는 내가 선생을 알고부터 10년간을 하루에 두끼 이상은 본디 모르시고 어떤 때는 2~3일씩 절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돌아가신 이제 다시금 가엾은 생각이 들어 눈물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옆에서 보다 못하여 선생께 여쭈고 내가 최해청(崔海淸), 최일행(崔一幸), 김영원(金永遠)씨 등에게 가서 다소의 변통을 해온 일까지 있었으니 애국자의 대접이 이 사회에서 이러하였던 것입니다.

절 이야기가 났으니 선생께서는 일찍 중국에 계실 때 대승불전을 거의 완전히 수업하셨으며 국내명찰(國內名刹)의 주지(住持)는 거의 알고 계셨습니다. 선생을 뫼시고 해인(海印), 동화사(桐華寺)를 구경갔을 적에 (권오돈(權五惇), 성락훈(成樂薰), 경북대교수 동반(同伴)) 주지와의 선문답(禪問答)의 결과 선생의 선지식(禪智識)에의 정통함에 놀란 동화사(桐華寺) 주지가 선생의 입사를 간청(懇請)하던 것과 불경을 빌려온 것을 기억하며, 팔달교 건너 있는 위봉사(威鳳寺)에는 자주 가셔서 후대를 받으셨던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교육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청소년의 교육방침에 대하여 당국의 시책을 비난하시고 과학교육(科學敎育)과 직업교육(職業敎育)의 철저(徹底)를 늘 말씀하셨으며 최해청(崔海淸)씨로 하여금 청구대학(靑丘大學)을 설립하여 청년교육에 힘쓰게 하시고 하기락(河岐洛)교수를 비롯하여 성낙훈(成樂薰), 권오돈(權五惇) 교수를 경북대에 오도록 주선하신 것이 모두 선생의 지도 공작(工作)의 결과이었습니다.

선생의 박학은 세상이 익히 아는 바이며, 책상 위에는 항상 영문판 타임지, 불문의 영국노동사, 신구약전서, 한문의 증문정공집 초한연의지, 에스페란트로 쓰여진 책, 불경 등이 놓여져 있었고 불문의 역사철학을 손수 번역하셨으며 타임지를 읽으시고 정세를 나에게 말씀하시던 것이었습니다. 또 때로 구상(具常)씨를 비롯하여 교수, 문인들이 찾아오면 일본의 나스메 소오세끼의 「나는 고양이다」를 강의하여 좌석(座席)을 아연하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선생은 항상 젊은 동지양성이 기본과업이라 말씀하시며 친(特)히 대학생에게 사상운동(思想運動)과 혁명(革命)의 필요성을 절규하시고 직접(直接) 지휘(指揮)의 선두에 나섰으니 실로 그 때 대구의 대학생 중에서 조금이라도 출중한 분자는 선생을 모르는 이 없었고 뵈옵기를 간원하는 학생들이 줄을 이었던 것이었습니다. 뵈옵기를 원하는 학생이 왔다고 아뢰면,

“그런 돼 먹지 않는 소리 작작해. 내가 왜 선을 보여, 좋다고 생각되거든 해 보고 그래서 모르는 것이 있으면 오라고 해. 그 애숭이 녀석들이 건방지게 선부터 보면 어떻게 할 텐가? 조직을 통해서 운동을 하라고 해. 그래서 합격된 놈은 만나보도록 하지. 왜 젊은 것들이 너절한 생각을 청산 못하고 제나 잘난체로 지도자를 만나뵈야 하느니 무슨 감투를 주어야 하느니 하는 것들은 한놈도 신통한 것이 없고 결과적으로 그 사람 개인을 망치고 당도 되지 않는 법이야. 이것은 내 50년 경험(經驗)의 결정(結晶)이니 틀림없어. 그래도 희망은 학생밖에 없으니 잘 해 보란 말이야.

이리하여 선생의 지도로 독노당 당헌에 따라 경북특위를 조직(組織)하여 주로 학생, 교수, 지식청년 흡수에 전력을 다하였으니 그 결과가 나타나매 득의만면하시면서

“됐어 됐어, 지금 우리 할 일은 이것 뿐이야. 어느 시기가 되면 민중은 얼마든지 우리에게 올 것이니 그들을 지휘(指揮)할 기본대오(基本隊伍) 즉 장교양성이 제일이야. 이것이 성공되면 우리는 한번 해 보는 것이고 실패하면 볼장 다 본거야. 그 까짓 소위(所謂) 기성정치인(旣成政治人)이랍시고 아침에 이 당에, 저녁에 저 당에 무슨 부장(部長)을 준다니 가봐야겠다는 어중이 떠중이는 우리당에는 한 놈도 필요가 없어.

대학을 열개를 나오고 박사호를 다섯 개 가졌더라도 우리당에 오면 역시 당으로선 초년생이 이런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만이 우리는 필요한 거야. 그리하여 우리 집단내(集團內)에서 물이 배고 뼈가 굵어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되는 거야.

하시면서 기본대오 조직(組織)의 중요성과 급박성(急迫性)을 주장하시었습니다. 이 운동(運動)은 선생이 돌아가신 1961년까지 계속(繼續)되었으며 그 결과 수 많은 대학생이 독노당의 정치노선(政治路線)과 단주선생(先生)의 이념(理念)을 이해(理解)하게 되었으며, 이 운동은 그 뒤 서울에도 파급되어 서울지구특위는 경북보다 더 많은 성과를 올렸던 것이니 선생의 정치이념의 선양과 혁명(革命)의 필요(必要)를 외침이 이와 같았습니다.

선생의 정치사상을 요약하면 봉건귀족(封建貴族)의 전횡, 자본계급(資本階級)의 특권(特權), 무산계급의 독재(獨裁), 전체주의의 극권(極權)정치를 배격(排擊)하고 상호의 이해(理解)와 협조(協助)만이 공동(共同)의 복리(福利)를 증진(增進)시킬 수 있으며 자유(自由)와 평등(平等)을 위하여 투쟁(鬪爭)하는 민주주의(民主主義)만이 인간(人間)을 현존(現存) 생활양식(生活樣式)의 고민(苦悶)에서 구출하여 영원한 안전과 무궁(無窮)한 번영(繁榮)에로 나아갈 수 있다고 확신(確信)하고 자유사회건설을 목표로 하였던 것이었습니다.

혹자는 선생을 가리켜 타협(妥協)을 모르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의 정객이라고 하였지만 선생의 탁월(卓越)한 정치이념(政治理念)과 확고부동한 사상혁명가로서의 면목(面目)은 다음의 몇가지 사실로서 입증이 되리라 믿습니다. 1951년이라 기억됩니다. 성재(省齊) 이시영(李始榮)선생께서 부통령으로 계실 때 국무총리의 교섭을 받은 적이 있었으며 좌우에서는 승락하기를 바랐으나 선생은 언하(言下)에 거절(拒絶)하시면서,

“모르고 하는 소리지, 할 수 없는 거야. 정객이 정권을 잡는 것이 제일 목표(目標)이긴 하지만 이 판국에 나혼자 들어가서 어찌 한단 말인가? 경천위지(經天緯地)하는 재주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은 나혼자만 도둑놈이 되고 아무런 실적(實蹟)을 올리지 못하고 말테니 손발이 없어 무슨 일을 하며 자리만 지키다가 나오는 건 정치적 도둑이야. 그래서 거절(拒絶)했어.”

해공(海公) 신익희(申翼熙)선생이 찾아 왔을때 이야기입니다.

“여 단주, 그렇게 고집만 부리지 말고 우선 우리가 누구를 업든지 잡은 다음에 버리면 될 테니 타협하고 같이 일해보세.”

“나는 못하겠소. 그런 자신이 있거던 해공(海公)이나 해 보소.”

하고 일언이거지(一言而拒之)하는 것을 목격(目擊)하였습니다.

자신의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을 위하여 일호(一毫)의 양보(讓步)와 방편(方便)을 몰랐던 선생은 과거 임정당시 십수년을 한방에서 동거하던 정의(情誼)도 아랑곳 없었으니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에 충실(充實)하여 일관(一貫)한 선생의 편모(片貌)를 여기서도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53년 여름 소위 부산정치파동의 시기에 선생께서는 그 곳에 가셔서 당과 선생의 유일한 비서 노명일씨를 잃고 (노비서는 선생을 뫼시고 부산에 갔다가 그 곳 해수욕장에서 심장마비로 급서(急逝)하였음) 애통(哀痛)해 하시는 선생의 모습을 차마 옆에서 사람으로 볼 수가 없었습니다. 수일을 단식(斷食)하시고 내가 노군을 죽였다고 몇 번이나 독백을 하시면서 당장(黨葬)식 전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는 조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는 모습에서 나는 동지애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1953년 봄부터 1955년 까지 나는 직장(職場)을 그만 두고 학교에 다니기 위하여 선생과 동거(선생은 3층, 나는 2층)하였는데 이 동안 실로 많은 교훈을 선생에게서 조석으로 받았으니 이야기의 범위는 당신의 경력 국내 재만 재중(남북경, 상해, 중경) 재학(成都)으로부터 귀국 후의 국내외 정세, 국내외 인물의 경력, 정치이념, 혁명이론 등 학교에서는 도저히 배우지 못하는 독특한 내용을 많이 들었던 것입니다.

또 이 동안에 일어난 가지가지의 일들 중에서도 대구당부의 당사시비 문제라던가 당세의 불여의(不如意)등 주위(周圍)의 모든 여건(與件)이 선생을 괴롭게 하는 것들이 날로 늘어갔으나 의연히 기아와 싸우며 고독(孤獨)을 지켜 조금도 거리낌이 없으셨으니 이 열렬한 혁명가는 당신 내부의 뜨거운 정열로써 차가운 주위(周圍)를 견디어 나가셨던 것입니다.

선생의 내적 생활은 적막 고독 따위의 문자이상으로 고적하셨습니다. 이 때 선생을 위로한 사람들을 기억나는 대로 적으면 첫째로 시인 구상(具常)씨입니다. 이 분은 당시 육본(陸本)이 대구에 있었기에 종군작가단 부단장으로 처음에는 어떤 공군소령 한 분과 선생을 내방하고는 거의 수일(遂日)오셔서 술과 음식을 사서 선생을 대접하였으며, 그 뒤 지금은 스님이 된 홍묘법장(洪妙法臧)을 대동(帶同)하고 와서 크릴로 청요리 집으로 다니면서 술과 농담으로 선생의 고독을 덜어 드리려고 애쓰던 것이었습니다. 선생이 원래 고혈압으로 주효가 모두 위생(衛生)에 거슬린다는 것을 당신께서도 아시고 나도 진언(進言)하였으나

“별 수 있나. 굶어 죽는 것보다는 먹다 죽는 편이 낫지. 술까지 못마시면 어쩌란 말이야.”

라고 반진반농(半眞半弄)의 말씀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선생은 외냉내온의 분이셨습니다. 선생의 고적(孤寂)을 조금이라도 덜어 드릴까 하여 어떤 여성 한 분을 따님으로 맞이할 것을 말씀드렸더니

“내가 본디 한 자식의 애비 노릇도 못하면서 또 분에 넘치게 딸을 얻다니 하여튼 한번 만나보기나 해볼까.”

하시면서 내심 만족해하시는 것같이 보임으로 인연(因緣)을 맺어 드렸더니 이래 오년 두 분은 서로 정을 나누었으며 중등교원으로 계신 따님은 방학 때마다 의복과 음식으로 정성껏 시봉하였고 아버지는 금반지를 사준다 구경을 시켜준다 하여 곁에서 보는 나로서는 기쁨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1960년 4·19후에 선생의 신변을 염려(念慮)하여 맨 먼저 달려간 이도 이분이었고, 선생의 부음을 밤중에 나에게 알리려 온 이도 이분이었습니다.

1954년 4월이라 생각됩니다. 하루는 귀교 도중에서 노상검문에 걸려 병역관계로 그만 잡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줄을 지어 곧 어디론지 붙들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길 건너 저쪽에 선생께서 나오셔서 나를 자꾸 보시면서 안경 밑으로 손수건을 몇 번인가 가져가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곧 인근(隣近) 파출소에 가서 재조사(再調査)의 결과(結果), 나는 다행히 놓여나와서 집에 오니 할머니(단주선생의 매씨)께서 그 동안의 소동을 이야기 하시기를,

“글세 할아버지에게 어떤 학생이 와서 네가 붙들려갔다는 말을 들으시고 ‘저걸 어떻게 하나 내 밑에서 고생만 하다가 끌려가게 되었으니 빨리 제가 먹던 보리쌀이나마 팔아서 갔다 주어라. 나는 그애 가는 것이나 봐야겠다.’ 하시면서 그 학생과 나가시지 않겠니.”

3년 동안에 제일 곤란하였던 것은 면회하러 오는 손님의 처리(處理)였습니다. 앞에도 조금 언급(言及)하였지만 심신 공히 피로(疲勞)하실 때 또는 손님과 이야기 중인데 사정을 알지 못하는 방문객은 굳이 뵈옵고 가겠다고 하고 당신께서는 다음에 오라고 전하라는 데도 손님은 무슨 간절한 볼 일이 있는지 꼭 뵈옵고 가겠다고 버티면서 하는 말이

“여 젊은이 너무 빡빡하게 그러지 말고 한번 더 여쭈어 보구료.”

이렇게 되면 가도 오고 못하고 쩔쩔매는데 손님이 거듭

“젊은 사람이 왜 그리 세정이 없담. 내가 선생을 만나는 것이 하나도 해될 게 없는데.”

하도 딱하여 다시 선생에게 여쭈면.

“아무리 덕이 된다 하여도 다 알고 있어. 이 다음에 오라고 해.”

이쯤 되면 실로 진퇴양난 혼자 고소(苦笑)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런 일은 그 뒤 7 29 선거 때 안동에서도 겪었으며 본의 아니게 오해를 받은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7 29 선거의 참패는 여기 재론하기 조차 싫고 그 일로 하여 나는 토혈 기관지염까지 겹쳐서 1년간 고생하였습니다. 내가 그 때 안동 시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관계로 1961년 1월 동계 방학 때 선생을 서울 제기동(祭基洞) 자택에서 뵈었을 적에는 심히 쇠약하신 모습으로 “이제 정말 활동(活動)해야 할 땐데 웬만하면 네가 서울 와서 나하고 같이 있었으면 좋겠구나.” 하시는 것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선뜻 대답을 못하고 이튿날 하직을 고하면서,

“할아버지께서 필요하다고 부르시면 언제든지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오겠습니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필요한 때는 정작 그 때였건 만은 뫼시지 못하고 부음을 받고 말았으니 새삼스레 가슴이 메어집니다. 그때 상경하였을 때 선생께서는

“지금 공산당 놈들이 갖은 모략(謀略)으로 송두리 채 감아 넘기려고 하지만 내가 있는 동안 우리당은 어림없지. 그렇잖아도 당의 일부인사가 몰지각하게 부화뇌동하여 그놈들과 합세하여 덤벙대고 있으니 딱한 일이여. 요즈음은 날마다 전화통을 붙들고 그놈들과 싸우고 욕질하는 게 내 일과이니 어찌 견딜 수가 있겠어.

하시면서 장면씨의 무능을 극구(極口) 비난하시고 이 시기가 가장 중요한 때인데 정부는 수수방관만 하고 좌익분자는 날뛰고 있으니 잘못하면 통째로 넘어간다고 통분해 마지않으시던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민족을 사랑하고 독립을 위하여 애쓰시던 선생이 1961년 4월 1일 68세를 일기로 영면하셨으니 천도도 무심한지고 어디서 다시 이렇게 투철(透徹)한 애국자 독립운동자 열열한 사회혁명가를 다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민족의 숙원인 남북통일을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완전한 독립이 멀었는데 선생이 먼저 가시다니 이 민족의 비운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가셨지만 그 탁월한 정치이념과 열렬한 혁명정신은 민족의 앞날을 생각하는 수많은 젊은이들 가슴에 영원히 살아남을 것입니다. 위대한 사상혁명가 단주 유림선생이시여, 구천에 고이 잠드소서. 삼가 명목(冥福)을 빕니다.

유림(柳林) 선생의 일상적(日常的)인 위풍(威風)

이 전(李 銓)7)


1947년 10월 17일 꼭두새벽, 나와 이창근(李昌根) 동지는 청운(靑雲)의 꿈을 안고 각각 고향집을 뒤로 하고 남시행(南市行)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곳에서 내려 철산군(鐵山郡) ‘동구지’까지는 걸어갈 작정이었다. 얼마 뒤 범선에 오른 일행 10여명은 야밤에 출발하여 육지를 가까이에 두면서 뱃머리를 남으로 남으로 향하게 하였다. 10월 19일,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우리는 인천항에 도착, 마침내 서울행 기차를 탔다. 우리는 중구청 부근에 있는 영락교회(永樂敎會)에서 후일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이 무렵 서울에서는 덕수궁에서 미소(美蘇)공동위원회가 열리고 있었고, 11월에는 유엔총회(總會)에서 한국문제가 상정(上程)되어 한국위원단 설치안(韓國委員團 設置案)이 가결되어 있었다. 이어서 12월에는 김구(金九) 주석(임시정부)의 남한 단독정부(南韓 單獨政府) 수립에 관한 반대성명이 발표됨에 따라 민족진영(民族陣營)에서는 찬반론이 대두되었다. 이때를 전후하여 나는 생각 끝에 서대문 동양극장 건너편에 자리한 압록강동지회(鴨綠江同志會) <김구(金九) 선생이 거처하는 경교장(京橋莊)앞>를 찾아 그곳에서 기거(起居)하기로 하였다. 압록강동지회의 회장인 신동섭, 선전부장 정몽각, 조직부장 김태섭 선배 등이 동지회(同志會)를 지휘하고 있었고, 나는 학생부(學生部)에서 별일 없이 시간을 까먹고 있었다. 말하자면 형극(荊棘)의 길이 시작된 거다.

이러구러하는 동안, 그해 말과 이듬해 초기에 이창근(李昌根) 동지와 나는 서대문 아현동에 사는 김용호(金龍浩) 선생을 찾아갔다. 李 동지가 어떤 연줄로 소개장을 받아 방문했는데, 金 선생은 표정이 온화(溫和)하고 학식이 풍부한데다가 화술면(話術面)에서 상대방을 끌어들이는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金선생은 현실을 소상히 분석하며 설명하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上海 臨時政府 國務委員)출신인 단주(旦洲) 유림(柳林) 선생님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나름대로 토로하기 시작하였다.

金선생에 의하면, 유림 선생님은 평생을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獻身)한 독립운동(獨立運動)가인 동시에 혁명가(革命家)라면서, 특히 어떤 불의(不義)와도 타협하지 않는 강직(强直)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높이 평가한 끝에 그분의 지도를 받으라고 권유하였다. 그분의 가르침은 곧 두 청년이 앞으로 나아갈 지표(指標)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결국 단주 유림 선생님의 휘하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된 것이다. 이하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통한 정치활동이나 유림(柳林) 선생님에 관련된 독립투쟁의 경위 등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기에, 여기서는 제목 그대로 선생님의 일상적(日常的)인 위풍(威風)이 인간형성(人間形成)의 기초적인 교훈(敎訓)으로 남겨졌다는 사실만을 다루기로 한다.

그래서 본고(本稿)에서는 ① 농부(農夫)로 변장한 유림(柳林) 선생의 피난길, ② 당사(黨舍) 앞에서의 일장 훈계(訓戒), ③ 사저(私邸)에서의 결혼식과 검소(儉素)한 생활 등을 차례대로 기술하고자 한다.


1. 농부(農夫)로 변장한 유림(柳林) 선생의 피난길


1947년 말에서 48년 초기(日字 미상)에 유림 선생님과 처음으로 대면(對面)한 인상은, 우선 위엄(威嚴)있는 풍채(風采)에 압도당하였다. 게다가 카이저 수염 밑에서 뿜어나오는 예리(銳利)하고도 정연(整然)한 정치적 분석과 예측에 사회 초년생(初年生)인 우리로서는 그저 입을 멍하니 벌리고 꼼짝하지 못하였다. 李 동지와 나는 기껏해야 고개를 가볍게 숙이곤 하였을 뿐이다. 이후부터 우리 둘은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당원으로 된 것과 다름이 없었다.

1948년 7월 17일 헌법(憲法)이 공포(公布)되고,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大韓民國政府)가 수립되었다. 10월에는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났으며, 1949년 6월에는 김구(金九) 선생이 암살당하여 모든 국민들이 놀라고 애석해 하였다. 이런 사건들을 전후하여 李 동지와 나는 유림(柳林) 선생님을 자주 찾아뵙고 참된 인간이 되는 가르침과 올바른 정치이념(政治理念)이 무엇인가에 대한 지도를 받았다. 그리하여 우리 둘은 점차로 당원(黨員)으로서의 정치적 자세(姿勢)를 가다듬기에 이르렀다.

당시 李 동지는 앞에 밝힌 김용호(金龍浩) 선생의 주선으로 전매관서(專賣官署)에 출근하고 있었고, 나는 굳이 말해서 李 동지에 기생(寄生)하고 있는 처지에 있었다. 기껏해야 중구 필동에 있는 당사(黨舍)에 들려 기관지인 노농신문(勞農新聞)을 읽거나 日本의 아나키스트들이 보낸 소책자를 들추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때 다만 보람있는 것이란, 에스페란토 공부를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유림 선생님이 나를 보자는 연락을 접하였다. 무슨 소임(所任)을 맡기는 것이 아니냐는 기대감으로 단숨에 달려갔다. 선생님을 대면(對面)하니, 그 근엄(謹嚴)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마음씨가 너그러운 촌로(村老)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실인즉, 에스페란토를 체계적(體系的)으로 배우라는 것이다. 대전 부근 유성에 사는 당원인 이윤희(李允熙) 선생을 소개하면서 한국에서 에스페란토의 권위자이므로 그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를 계속하라는, 이른 바 특전(特典)을 부여한 것이다. 선생님의 의중(意中)에는 다른 점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가 에스페란토 공부를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무위무탁(無依無托)한 처지에 있기에 임시방편으로 구제하려는 뜻이 더 강해져서 유성행의 결단을 내린 것이라고 믿었다.

그해 3월에 남노당 총책(南勞黨 總責) 김삼용 이주하(金三龍 李舟河)에 대한 검거가 있은 뒤, 6월 25일 오전 4시 북한군이 38선 전역에서 일제히 불법 남침(不法 南侵)을 감행하였다는 소식을 유성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던 6월 말(?)에 이르러 뜻밖에도 유림(柳林) 선생님이 최문호(崔文浩) 동지를 대동하고 유성에 도착하였다. 말하자면 서울서부터 피난길에 나선 것이다. 그날 밤 선생님은 전황(戰況)의 심각성과 전쟁이 쉽게 끝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내렸다. 그리고는 2인분 3개월 분량의 미숫가루를 준비해 달라고 李선생에게 부탁하였다. 선생님은 이때부터 요즘 흔히 말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튿날 새벽, 선생님은 농부(農夫)로 변장하였다. 흰 광목바지와 저고리에 밀짚모자를 쓰기로 하고, 신발은 검은 고무신이면 만족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농부(農夫)로 변장하기는 하였으나, 피난하는 동안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흙탕물을 튕기게 하여 선생님의 바지와 저고리를 낡은 것으로 변하게 하며, 밀짚모자도 가끔씩 땅바닥에 깔고 앉도록 유도하기도 하였다. 얼핏 보아도 양반집 선비의 모습과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짊어진 미숫가루가 들어 있는 자루는 매우 요긴한 것이기도 하려니와, 때로는 밉게 여겨지기도 하였다. 배가 고프면 편지봉투 절반 정도의 분량(分量)을 물에 타서 먹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 미숫가루를 먹고 싶을 때에 먹지 못하다 보니, 짊어진 미숫가루가 없는 것보다 못하여 밉게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중국 등지(中國 等地)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의 절약정신(節約情神)이 몸에 배어 있는데다가, 민가(民家)에 피해를 입히는 것은 당치도 않다면서 미숫가루는 아끼고 아껴야 한다는 선생님의 눈이 무서워서 몰래 먹기조차 못하였기 때문이다. 유림(柳林) 선생님의 이러한 정신은 지난날의 독립(獨立)투쟁에서 얻은 체험적(體驗的) 결과에서 출발되어 있으며, 보다 위급(危急)할 때가 언제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狀況)에 대비(對備)하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선생님의 걸음은 느린 편이었다. 게다가 차량(車輛)의 행렬이 많은 대로(大路)를 피하고 시골의 소로(小路)를 택한 결과 오솔길은 울퉁불퉁하여 피난길은 고행(苦行)길과 같았다. 그런 도보행군을 거듭하여 옥천을 벗어나 영동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이때부터였던가. 나는 배가 고파서 더 이상 걸음을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앞서가는 선생님의 뒤에서 남몰래 보따리를 내려놓고 미숫가루를 한 움큼 집어 입에 넣었다. 물에 타지 않았으니 목에 잘 넘어갈 리가 만무하다. 입안에 미숫가루가 가득히 차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목구멍에서 나오는 캑캑거리는 소리를 토하고 있을 때 앞서 가던 선생님이 나를 불렀다. 어떻게 대답할 수가 없어서 나는 순간적으로 논두렁에 엎어졌다. 그리고는 가까스로 절반쯤 미숫가루를 처리하고 선생님의 뒤꽁무니를 따라잡으려고 애쓴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 뒤부터는 하루 두 번 미숫가루를 먹는 것 외에는 선생님의 눈을 속이지는 않았다.

앞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선생님의 걸음은 느린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더 이상 느리지는 않았다. 체력(體力)을 균등(均等)하게 분배(分配)하여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한눈조차 팔지 않으면서 앞만 바라보는 도보를 계속할 뿐이었다. 지친 기색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도의 역경(逆境)을 극복한다는 것은 식은 죽 먹기라는 표정으로 터벅터벅 걷다가 가끔 헛기침을 하곤 하였다. 그 헛기침은 피로의 누적(累積)에 의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하얗던 무명 바지와 저고리는 땀에 젖어 누렇게 변하고, 내의(內衣)는 엉망으로 되어 있을 것이 분명하였다. 밀짚모자는 한쪽 가장자리가 찢겨져 있었다. 영락없는 농부(農夫)로 변해 있는 것이다.

잠자리는 촌락(村落)의 초가집을 택하였으되, 절대로 안채의 제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랑채를 택하면서 주인에게 정중한 인사를 표하곤 하였다. 혹시 그 집에서 아침식사를 제공(提供)할는지도 모르므로 우리는 일찍 일어나 인사만 남기고 도망치듯 빠져나오기가 일쑤였다. 하루는 미숫가루를 먹으려고 어느 농가(農家)를 찾아 물을 좀 달라고 청하였다. 쉰은 넘어 보이는 아낙네가 건네준 물에 미숫가루를 타서 저녁밥을 대신하고 있는데, 그녀가 우리를 보고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서 조그만 쟁반에 밥 두 그릇과 반찬 한 접시를 차려 들고 다가와서 어서 들라고 권하였다. 마침 뉘엿뉘엿 해가 저물기 시작한데다가 선생님의 표정이 범상(凡常)한 것이 아니라고 싶었는지 길손에게 동정을 베풀고자 내놓은 것이다. 하지만 선생님은 아무런 말도 없이 그 농가(農家)에서 빠져나가기가 바빴다. 민폐(民弊)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신념(信念)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침이 꿀꺽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아낙네에게 대충 사정 이야기를 남기고 물러났다. 선생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이 뒤도 돌아보지 않으며 앞에서 전진(前進)할 뿐이었다.

마침내 김천과 구미를 거치고 대구에 당도하였다. 다른 피난민과 같이 간선도로를 택했다면 이미 도착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부락과 부락사이의 소로(小路)만 택했기 때문에 남들보다 2일간은 더 소비했을 것이다. 아무튼 각고(刻苦) 끝에 대구 당사(黨舍)에 이르는 동안까지의 행적을 지금 다시 떠올리면 나에게는 인간형성(人間形成)의 밑거름이 되었고, 간간히 들려준 선생님의 말씀을 평생의 교훈(敎訓)으로 삼으며 그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터이다.


2. 당사(黨舍) 앞에서의 일장 훈계(訓戒)


얼마 뒤 중국군(中國軍)이 한국전쟁에 개입했다는 소식이 들여왔다. 그러는 중에 유엔군이 북한 신의주(新義州) 앞 40km 지점까지 진출(進出)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군의 계속 남진(南進)으로 아군(我軍)의 전세(戰勢)는 불리하게 되었다. 끝내는 국군(國軍)과 유엔군의 철수가 시작되고, 1951년 1월 4일에는 소위 1 4후퇴로 인하여 정부는 부산(釜山)으로 옮겨갔다. 이런 상황을 전후하여 정부는 젊은이와 장년층에 대한 북한(北韓)에의 강제 연행(連行)을 방지하기 위해서 국민방위군(國民防衛軍)으로 전국에서 일제히 소집명령을 발부하였다. 만일 그들이 서울 등지(等地)에 남아 있다가 적에게 붙들리게 되면 적의 전력강화(戰力强化)를 이룩하게 되므로 그것을 막으려는 것이 소집(召集)의 뜻이었다.

당시 유림(柳林) 선생님은 중구 광희동 2가 303의 18에 소재(所在)하는 사저(私邸)에 기거하면서 중구 필동에 자리한 독립노농당사(獨立勞農黨舍)에 들르곤 하였다. 어느 날 오전 당사에 당도해 보니 젊은 당원 3, 4명과 경찰관 한 명이 무엇인가 언쟁(言爭)을 벌이고 있었다. 경찰관은 필동 독립노농당사에 주소를 둔 이령(李鈴)과 이전(李銓) 형제의 국민방위군 소집영장을 보이며 당사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이때 유림 선생님이 당사 앞 노상(路上)에 나타나셨다. 그러자 경찰관은 독립노농당이란 북한의 노동당(勞農黨)과 일맥상통하는 정당이 아니냐는 망언(妄언)을 하였다, 그것도 거침없이. 선생님은 노발대발(怒發大發)하며 경찰관을 향하여 꾸짖기 시작하였다. 그러는 중에 다른 경찰관 3, 4명이 가세하더니 선생님을 둘러싸는 게 아닌가. 무슨 범죄의 피의자(被疑者)를 연행하기 직전의 태세와 같았다. 당원들은 그런 자가 언제 여기에 주소를 두었는지 알지도 못하며 그들을 본 적도 없다고 해명(解明)하였다. 그럼에도 경찰관들은 일보도 물러서지 않으며 선생님을 향해서만 다그치듯 대들었다. 선생님은 마침내 경찰관들을 향하여 일장의 훈계(訓戒)를 하였는데, 그 요지(要旨)는 대충 다음과 같았다.

“경찰관 자네들, 내 주위에서 물러서지 못해! 없는 사람을 내놓으라니, 그게 될 말이냐? 게다가 자네들 가운데 누군가가 여기 뚜렷하게 대낮에 간판을 걸고 있는 독립노농당이 북쪽의 노동당(勞動黨)과 일맥상통하고 있다고?”

이러는 동안에 행인(行人) 3, 40명이 당사 앞에서 걸음을 멈춘 채 경청하고 있었다. 선생님의 위풍당당(威風堂堂)한 모습과 열변에 압도당한 듯이 웅성거리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훈계는 계속되었다.

“우리 독립노농당은 북쪽의 노동당과 아주 다르다는 걸 알아야 해! 북쪽은 소련의 사주(使嗾)에 의해 마구잡이식으로 만들어진 집단(集團)인데다가 노동자 농민을 해방시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자기네 집단을 유지하며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야. 다시 말하자면 착취하려는 술책(術策)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일세. 그렇지만 우리 독립노농당은 그것과는 다른......, 그러니까 민주적(民主的)으로 개혁하여 노동자 농민을 보호하며 권익(權益)을 가져다주려는 정당이란 걸 알아야 하네.”

그러자 모여든 행인들은 더러 머리를 끄덕이기도 하였으나, 경찰관들은 여전한 자세로 자기들은 법을 집행(執行)하면 그만이라는 투로 소집영장을 계속 흔들어 보이기만 하였다. 이러고 보니 선생님의 입장이 곤란해지고 그 처지가 궁지(窮地)에 몰려 있는 것처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전시(戰時)인지라 선생님의 신상(身上)에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도 모를 절박감마저 꿈틀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경찰관들은 빈손으로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소집영장 제시(提示)에 불응한다는 것은 비국민(非國民)이 아닐 수 없다고 육박할 경우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선생님의 훈계(訓戒)로 경찰관들의 말투는 한결 부드럽게 변했으나, 그렇다고 단념(斷念)하려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그때까지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광경을 바라보고만 있던 나는 속으로 결심(決心)하였다. 내가 대신 ‘이전(李銓)’이라고 자칭하며 나서기로 하자. 선생님의 고경(苦境)을 벗어나게 할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내가 대신 소집당한다고 할지라도 죽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난번 대구(大邱)에의 피난도 내가 모셨고, 심지어 빨갱이 집단과 가깝다는 오명(汚名)을 씻기 위해서라도 내가 나서야 한다. 이름은 나중에 찾으면 그만이 아닌가. 전쟁통에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더욱이 선생님은 일부 경찰관으로 인하여 봉변을 당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나는 ‘이전(李銓)’이란 이름으로 둔갑한 것이다. 나는 당시 이창근(李昌根) 동지와 함께 성동구 금호동에 기계류를 해놓고 있었다. 나의 생년월일은 1929년 12월 19일 (음력 9월 1일)인데, ‘이전(李銓)’이란 이름의 인물은 1925년 5월 27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나의 생년월일로 되어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하지만 조국선(趙國善) 동지는 지금도 나를 ‘이전’이라고 부르지 않고 本名인 ‘안병식(安秉植)’이라고 부르고 있다. 육군 제8사단(第八師團) 작전처(作戰處) 재직시 제 1회 육군공군(陸軍空軍) 전장병(全將兵) 문예작품(文藝作品) 현상모집에서 소설부문이 당선된 직후 제대증(除隊證) 이전(李銓)을 근거로 호적을 만들고(실향민), 그 이름으로 작가생활(作家生活)을 하는 동안 본명 안병식(安秉植)을 되찾을 기회는 있었으나,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유야무야(有耶無耶)로 내버려 둔 것이 결국 부모님께 씻지 못할 죄를 짓게 되었다.


3. 사저(私邸)에서의 결혼식과 검소(儉素)한 생활


1953년 7월 17일 휴전협정(休戰協定)이 체결되기 얼마 전 나는 국방부 산하에 있는 민병대사령부(民兵隊司令部) (사령관 신태영(申泰英) 장군) 훈련처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 때 어느 날 부산(釜山)에 피난 가 있던 약혼자가 느닷없이 서울역 광장(廣場)에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약혼자에게는 이미 장녀가 딸려 있어, 연락을 받은 순간 눈앞이 캄캄하였다. 거처할 곳도 없는데다가 나에게는 생활을 지탱하는 능력도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희동 근처까지 약혼자를 데리고 가서 기다리게 하고서는 유림(柳林) 선생님께 사실을 고하였다. 선생님은 소상한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묻지도 않고 당장 데리고 오라고 하셨다. 나는 당시 군복(軍服)을 입은 채 광희동에서 민병대사령부가 자리한 남대문(南大門) 부근까지 통근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와 약혼자는 선생님의 사저(私邸) 지하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어느 날부터 인지 선생님의 살림을 아내가 맡게 되었다. 그렇게 수개월이 경과한 뒤, 나는 제대(除隊)를 하게 되었고, 곧장 출판사(出版社)에 나가며 선생님과 생활을 같이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이창근(李昌根) 동지와 몇몇 동지가 나서서 나의 결혼식 거행을 선생님에게 진언하였다. 선생님은 역시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허락하셨다. 그 자리에서 결혼식은 사저에서 간단히 거행하되, 초대(招待)할 사람은 제한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그러고는, 주례(主禮)는 당의 감찰위원장인 유우석(柳愚錫) 선생으로 결정하라는 분부가 내렸다. 그래서 유관순(柳寬順) 열사의 친오빠인 유우석 선생에게 별도로 사실을 전하고, 나는 나름대로의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창근 동지가 선두(先頭)에 나서고 나의 신의주상업학교(新義州商業學敎) 동문인 이형환(李炯煥)군이 거들었다. 결혼식 며칠 전, 선생님은 우리 부부를 불러 앉히고 부부의 도리(道理)는 서로 이해(理解)하는 데서 출발하여 지속(持續)되어야 하며, 일찍부터 가난과 싸우는 훈련을 거듭해야 한다고 간단하게 일렀다.

결혼식장은 선생님의 사저 2층에 장식되었다. 주로 이형환군의 노력으로 가운데에 책상을 놓고 위를 테이블보로 덮고서는 4방8방으로 테이프 등속을 매달아 제법 근사하게 꾸며 놓았다. 유림(柳林) 선생님은 가끔씩 나타나서 엷은 웃음을 짓곤 하셨다. 결혼식에는 선생님 임석하에 주례(主禮)는 물론, 우한용(禹漢龍) 박석홍(朴錫洪) 최갑용(崔甲龍)등 선생과 우한기(禹漢基) 신기초(申基礎) 이창근(李昌根) 동지, 그 밖의 몇몇 사람들이 참석하여 축복해 주었다. 조촐하게 마련된 결혼식 직후의 피로연에서 옷을 바꾸어 입는 신부(新婦)는 선생님에게 따로 잔칫상을 마련하여 바쳤으나,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마다하고 다른 간부(幹部)들과 합석하여 대화(對話)를 즐기며 드시면서 흐뭇한 표정까지 지은 기억이 있다.

며칠 뒤, 선생님은 우리 부부를 다시 불러 앉혔다. 그 요지(要旨)를 정리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사람이란 좋아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 균형과 평정(平靜)을 얻기가 힘들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그의 선(善)만을 보고 그의 악(惡)은 보지 못하며, 만일 미워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악(惡)만을 보고 그의 선(善)은 보지 못한다. 우리들이 볼 수 있는 옛날의 《대학(大學)에서는 이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이어서 “몸은 피곤해도 마음이 편안한 일을 하고, 이익은 적어도 의로움 많은 일을 하라”고 강조하셨다. 말미에 이르러서는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이 두 가지 말에 의하여 행(行)한다면 과실(過失)이 어디에 있겠느냐고 묻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모를 효성(孝誠)스럽게 봉양(奉養)하라, 형제와 우애(友愛)하라는 등 인간형성에서 반드시 필요한 여러 가지 교훈을 들려 주셨다. 우리 부부는 단주 선생님과 근 1년간 한 지붕 아래에서 생활을 같이 하였다. 물론 선생님의 침식은 아내가 담당하였다.

선생님의 슬하에는 일남일녀(一男一女)가 있다. 아들은 5·16 혁명의 주동자(主動者) 가운데의 한 사람인 유원식(柳原植) 대령, 딸은 유(柳) 아무개로 알려져 있었다. 유원식 대령은 일제(日帝)의 만군(滿軍) 출신으로서 혁명정부 당시 화폐개혁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뒤에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朴正熙) 장군과도 친밀한 사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아들과 대면하지 않았던 이유는 널리 알려진 일이다. 아버지(선생님)는 일제(日帝)와 싸우며 조국의 광복을 위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아들(유원식)은 일제에 협력하여 군인의 입장에 선, 말하자면 정반대(正反對)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일찍부터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터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아들로부터 더욱이 생활비(生活費)의 일부나마 받는다는 것은 친일파(親日派)와 다름이 없기에 단호히 거절하였음은 물론, 대면(對面)조차 불허하셨던 것이다. 어쩌다가 당의 간부가 실수하여 아들을 들먹이면 곧장 외면(外面)하는 것이 예사였다.

유(柳) 아무개라는 딸은 경찰관(당시 총경(總警)으로 알고 있었다)과 결혼하여 산다고 해서 멀리하며 접근(接近)조차 못하게 하는 선생님이었다. 그러니까 권력의 하수자(下手者)에 불과한 자와 결혼하는 것은 자신의 뜻과는 정반대였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그 딸은 광희동 사저를 자주 찾아오곤 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으나 우리 부부가 기거하는 지하실 바깥문 쪽에 접근하여 아내에게 선생님의 안부를 묻곤 하였다. 만일 생활비 일부라도 지원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오히려 아내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을 이미 짐작하고 금전(金錢) 같은 것은 전하지 아니 하였다. 때로는 그런 눈치를 보이면 아내가 한 발 물러나서 대화(對話)조차 거부하였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딸은 다시 찾아와서 아내를 설득(說得)하기 시작하였다. 금전은 그렇다고 치되, 쇠고기와 같은 것은 요리를 해서 바치면 그만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내는 그렇지 않아도 영양가(營養價)가 있는 반찬을 바치지 못하고 있는 터인지라 그 쇠고기를 마지못해 받았다는 것이다. 딸의 간청도 물리치기가 거북하여 결국 받아서 그날의 저녁상에 쇠고기요리를 올려놓았다. 선생님은 저녁상을 받고 잠시 바라보더니, 왜 이런 짓을 하느냐고 하면서 밥상을 가져가라고 호령하셨다. 아내의 주저주저하는 모습을 보고 모든 것을 짐작하고 있다는 표정(表情)으로 거듭 야단치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이처럼 눈치로 때려잡는 명수(名手)인지도 몰랐다.

이것은 그렇다고 돌리고, 선생님은 출처불명(出處不明)의 도움은 절대로 받지 않았다. 인현동에 사는 유광식(柳廣植)이란 조카의 도움(생활비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과 이름을 밝힌 당의 간부들, 그밖에 이창근(李昌根) 동지 등의 도움은 기껍게 받아들였다. 이렇고 보니 검소(儉素)한 생활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남들 같으면 간간히 보약이라도 복용하여야 하겠지만, 그럴 여유는 조금도 없었다. 일상시의 식사는 서민(庶民)들의 그것과 다름이 없었다. 밥 한 그릇과 국 한 사발, 반찬 두세 가지가 고작이었다. 어쩌다가 손님이 와서 밥상을 마주할 때에는 손님이 앉는 쪽 밥상 밑에 밥 한 그릇을 여분(餘分)으로 놓는 것이 다를 뿐이다. 손님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마음대로 처분(處分)하라는 표시인 것이다.

선생님은 반주를 들지 않는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망명생활과 독립운동을 하다 보니, 그럴 습관이나 여유가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환국(還國)한 뒤의 검소하고도 소박한 생활이 그런 반주를 못들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선생님의 식성은, 음식이라면 아무 것이나 들었다. 음식을 가리는 법은 전혀 없었다. 밥 한 그릇은 언제나 거뜬히 비워 치웠다. 선생님으로서는 모든 사정을 짐작하고 있는 터여서 기껍게 식생활을 보내곤 하셨다.

광희동 사저는 적산가옥(敵産家屋)이다. 일본식의 전통적인 ‘다다미’방이 있고, 창문도 여러개 있다. 차가운 겨울에는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다. 특히 삭풍(朔風)이 몰아칠 경우에는 내실(內室)의 창호지문이 덜커덩거리기 십상이다. 어디 한군데라도 온기(溫氣)가 흐르는 곳이 없다. 선생님은 그런 내실에 앉아 한복(韓服)을 입은 채 팔짱을 끼고 좌우로 몸을 흔들며 독서를 하곤 하셨다. 주로 영문판 타임지를 읽거나 불 중 일어판 서적을 탐독하곤 하셨다. 냉기(冷氣)가 가득한 내실에서 그런 모습을 보다 못하여 아내는 임시방편으로 화롯불을 마련하여 선생님께서 자리를 떠난 사이에 그것을 내실 한가운데에 놓고 슬그머니 내려왔다. 이윽고 선생님께서 아내를 부른 것은 물론이다. 선생님은 올라온 아내를 보고 아무리 춥다고 해도 화롯불을 쬐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화롯불을 쬐고 있으면 습관이 되고, 더 춥게 되어 그것이 없으면 견디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므로 오히려 없는 것이 좋다면서 화롯불을 얼른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도 선생님의 간난(艱難)을 이겨내는 기상(氣像)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이런 일도 있다. 하루는 아내가 딸을 업고 2층으로 올라가서 조반상을 바치고 물러나다가 등에 업은 딸(세 살)이 찡얼거리며 바닥에 내려놓기를 원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해주고서는 오랜만에 2층 바깥 풍경에 한눈을 팔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딸은 별안간 2층 계단에서부터 아래로 떨어졌다. 말하자면 7, 8개 정도의 계단을 때굴때굴 굴러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 소리가 요란했던 것 같다. 크게 쿵쾅거리지는 않았으나, 아무튼 그 소리는 요란했던 모양이다. 선생님께서 놀라서 뛰쳐나왔음은 물론이다. 아내도 놀라며 아래로 내려가서 딸을 안아 일으켰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딸은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빤히 올려다볼 뿐이었다. 어디 한군데라도 다치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선생님의 심한 꾸중이 아내 위에 떨어졌다. 아이들을 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등, 어머니가 한눈을 판다는 것은 조심성이 부족해서 그런다면서, 인간사(人間事)란 언제 어떤 불상사를 자초(自招)하는지도 모를 연속이라고 훈계한 것이다. 그럼에도 아내는 그러한 훈계로 인하여 오히려 선생님에 대한 친밀감과 시부모님 이상의 인간미(人間味)에 감탄한 나머지 지하실에 돌아와서 찔끔찔끔 눈물까지 흘렸다는 전언(傳言)이 있었다.

이상 반세기(半世紀) 이상이나 추억을 더듬고 보니, 새삼 유림(柳林) 선생님의 정치철학(政治哲學)과 고매(高邁)한 자세 등에 거듭 머리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인간형성(人間形成)을 위한 교훈을 부분적으로 체득하기는 하였으나, 그 교훈의 몇분지 일이라도 나의 것으로 소화(消化)했는지 부끄럽기만 하다.

이 기회에 부언(附言)한다. 흔히들 유림(柳林) 선생님을 두고 아나키스트라고 한다. 이상사회(理想社會)를 실현하려는 아나키스트임은 확실하다. 중국(中國)과 만주지역(滿洲地域)에서 독립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할 때에 바로 그러하였다. 아나키즘이란 흔히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로 번역되면서 사회의 혼란과 파괴의 대명사(代名詞)처럼 여기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니키즘은 자본주의(資本主義)의 착취와 공산주의(共産主義)의 독재를 넘어 각자의 인간성(人間性)을 존중하는 국민자치(國民自治)에 의한 이상적(理想的) 사회를 실현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일제 식민지시대(日帝 植民地時代)에 아나키즘은 민족주의 공산주의(民族主義 共産主義)와 더불어 독립운동의 3大 사상적 조류(潮流)였다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인 것이다.

당시 대표적(代表的) 아나키스트인 신채호(申采浩) 선생과 유림(柳林) 선생, 유자명(柳子明) 선생 등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여러 가지 불합리(不合理)한 모순을 극복하는 공동체(共同體) 사회를 건설 실현하고자 힘썼다. 이런 선상에서 유림 선생님께서는 우선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고 임시정부(臨時政府)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가 환국(還國)하신 것이다. 그 뒤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기반으로 한 정치활동은 앞에서 지적한 그대로 이미 알려져 있는 바와 같다.

끝으로, 매년 4월 1일이면 수유리에 자리한 선생님의 묘소(墓所)를 참배(그것도 몇 년 전부터)하여 선생님의 체취(體臭)를 느끼며 위대한 업적을 상기(想起)하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전에는 등한시(等閑視)해 온 자신의 못난 행적을 꾸짖고 있을 따름이다.


1) 1956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의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2) 1957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부의장 겸 간사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3) 1956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부의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감사

4) 1955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한국자주인연맹 부의장,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감사

5) 1948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고문, 한국자주인연맹 고문,

6) 1952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이사, 안동향교 전교.

7) 1948년도 독립노농당 입당, 현재 단주유림선생 기념사업회 이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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