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라는데.....

유림: ‘무정부’라는 말은 아나키즘(anarchism)이란 그리스 말을 일본 사람들이 악의로 번역하여 정부를 부인한다는 의미를 통용되는 것 같은데, 본래 <an>은 없다는 뜻이고 <archi>는 우두머리, 강제권, 전제 따위를 의미하는 말로서 <anarchi>는 이런 것들을 배격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강제적 권력을 배격하는 아나키스트이지,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아나키스트는 타율정부를(heter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지, 자율정부(autonomous government)를 배격하는 자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아나키스트들은 유토피아를 추구하면서 사상면에서 큰 공헌을 하면서도 현실면에서는 패배를 거듭해왔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부터는 현실적 조직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이 정부는 3 ·1운동에서 탄생한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것이다.


문: 임시정부에 가입하게 된 동기는?

유림: 내가 정치운동에 참가한 것은 불과 5년밖에 안된다. 나의 이상은 강제 권력을 절대로 배격하고 전 민족, 나아가서는 전 인류가 최대한의 민주주의 하에 다같이 노동하고 다같이 자유롭게 사상하는 세계를 창조하는 데에 있다. 중일전쟁이 일어난 당시 나는 일본제국주의는 반드시 패망하고 조선은 해방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의 자주독립이 언제 달성될 것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허다한 난관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이 한 고비의 난관만 돌파하면 반드시 독립하리라는 것이 환하게 내다보였다. 이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 근거를 나는 임시정부라고 보고 거기에 합류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의 주의나 주장을 잠깐 보류하고, 서로 일치 단결하여 독립이란 산을 넘은 후에, 각자의 주의를 위하여 매진하자는 것이다. 임시정부란 요컨대 그러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요, 근거라는 말이다.


문: 지금 조선에는 정당이 난립하고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유림: 좋은 현상이라고 본다. 몽고인보다 더 정치적 기회를 얻기 힘들었던 조선사람이 이 기회에 그만한 정치적 의욕도 없다면 장차 어찌 민주주의를 수립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적 정치질서는 결국 3, 4개의 정당으로 정리되리라고 본다


문: 임시정부는 연립정부인데 차후의 운동과 어떠한 관련이 있는가?


유림: 나는 원리만을 어디까지라도 관철할 것이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5일)


위의 옮긴 글은 임정 국무위원 유림이 1일 귀국한 직후 가진 기자회견문이다.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자격으로 임정에 임한 그는 이 기자회견을 통해 아나키즘에 대한 일반의 오해 내지 편견을 지적하면서, 해방정국을 맞이하여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는데 동참하려는 그의 건강한 호기를 읽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같은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 대목은 유림이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와 구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제1인터내셔날(국제 노동자협회, 1864~1876) 이래 아나키스트들은 일반적으로 조직적인 정치활동, 다시 말하자면 정당활동에 대하여 일종의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런 까닭에 유림의 앞서 지적대로 ‘사상면에서 큰 공헌을 하면서도 현실면에서는 패배를 거듭 해 왔던’ 것이다.
그렇지만 민족의 당면한 과제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마당에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 식민지시대에 그러한 조직을 유림은 망명 임시정부에서 구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 자격으로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라고 이해된다.

유림(일명 柳華永, 아호는 단주)의 삶은 앞서의 기자회견문에서 언뜻 느낄 수 있듯이 나름대로의 이론에 바탕한 실천의 이어짐이었다. 비록 그 이론이 우리 시대엔 거의 논의되지 않는 ‘지난 것’으로 치부되고, 그의 실천이 좌우 대립, 분단이란 한계적 상황 밑에서 원칙론을 고집함으로써 구체적인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유림 그 자신은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하고 성실했던 인물이다.
때때로 지나칠 정도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원칙론>에 집착, 당 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독불장군’이란 별호를 얻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유림만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게 지조를 지켜나간 이도 많지 않다. 이런 점에서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가 바로 유림이다. 비록 나름대로 <한계>를 지닌 그이지만, 식민지 시대와 분단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쳐 갔던 고뇌어린 한 인간의 삶을 재조명 해보는 것도 의미가 있는 일이겠다.

김재명, ‘정경문화’ 1986년 1월호 pp. 386~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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