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주의 생애와 사상
-전국 아나키스트대회와 독립노농당 창당-
1945년 12월 2일 유림은 다른 임정 요인들과 더불어 김포비행장을 거쳐 그리던 고국 땅에 되돌아왔다. 이제 52세에 이른 유림은 그의 카이제르 콧수염으로 세인의 주목을 끌었다. 그렇지만 그가 주목을 받은 더 큰 이유는 아나키즘이란 그의 독특한 이념 탓이었을 듯하다. 이글 맨앞에서 인용하였지만, 다른 임정요인들과 함께 임시숙소로 사용한 한미호텔(충무로 대연각빌딩 부근)에서 가졌던 기자회견은 당시 일반인들이 유림에게 쏟았던 관심도의 깊이를 짐작케 한다.
유림이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9일 서울에서는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모여들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약칭 자련)을 조직하였다. 그 조직 구성원은 한국·중국·일본 등 각지에서 활동하던 이들로서 •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의 창립연맹원 이을규, 이정규 형제를 비롯 •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이석규 • 재일본흑우연맹 한하연, 김금순, 이시우, 이동순 • 흑기연맹 서상경, 서천순 • 오우연맹 신재모, 원한상, 서흑파, 우해용, 하종진 • 남화한인청년연맹원 유산방, 김지강, 이규창, 김광주, 황웅 • 원산본능아연맹원 유우석, 김연창, 조시원, 김광면 • 제일루사건의 최학주, 오남기 • 관서흑우연맹원 승흑용, 이주성 • 원산일반노동조합원 이혁 • 마산아나키스트그룹 한명용, 김용호 • 정평흑우회 차고동 • 일본동흥노동연맹 양일동 • 안의아나키스트그룹 우한용, 하기락, 박영환 • 서울아나키스트그룹 조한응, 양희석, 김재현, 장연송, 이규석, 이종연, 이경청, 기타 각 지방에서 박기홍, 김철, 박호연, 이용규, 공형기, 김건, 임기병, 변순제, 이성근, 박망, 장태화, 차이혁, 김영찬, 이여유, 이종락, 장지필, 박철원 등이 참석하였다.
‘인간 위에 인간 없고 인간 아래에 인간 없는 평등사회를 세우고자 한다’는 강령아래 이처럼 아나키스트들이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을 조직, 나름대로 조직적인 활동을 펴나가던중 1945년 12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중심인물인 유림이 귀국하자 아나키즘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해 12월 22일 서울에 모인 아나키스트들이 지난 식민지시대에 활동하다 작고한 동지들의 추도회를 통해 다시금 조직을 다져나갈 터를 마련했다.
임정 주석 김구와 이시영(아나키스트원로 이회영의 동생)이 내빈으로 참석한 이 자리에서 유림은 추도사를 통해 ‘지난 4반세기 동안 우리 아나키스트들이 국내 혹은 해외에서 피흘리며 싸운 당면한 제1차적 투쟁목표는 일제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조국을 해방시켜 민족자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었음을 확인하면서 국토가 양분되고 민족의 분열이 조장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즉 그는 ‘전후 국제세력간의 양극적 냉전’이 이 땅에 ‘연출’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세에 의존하고 편승하여 집권을 노리고 광분하는 반민족적 비민주적 세력들이 민족의 내부에 급속히 자라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만일 사태가 이대로 진전되는 날이면 이 강토에 장차 어떤 비극이 다시 연출될 것인지 실로 예측을 불허한다”고 앞날을 걱정하였다.
유림의 해방정국을 보는 시각은 계속해서 비판적이기만 하다. 즉 ‘민족의 구심적 의지를 외국군의 철수와 군정의 철폐로 집중해야 하겠거늘, 오히려 그들의 등 뒤에 업혀서 자기세력의 확대에 여념이 없음으로 해서 좌우 양 세력의 대립이 깊어만 가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이같은 시각에서 유림은 추도사를 통해 다음과 같은 주장을 펴나가고 있다.
우리가 극복하고 넘어가야 할 난관은 밖에 있다기 보다 오히려 우리 민족의 내부에 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통일된 민족의 자주적 독립이란 하나의 공통된 목표 아래 각자의 주의나 주장을 초월하여 우리가 굳게 뭉쳐 있다면, 우리 주변의 국제적 정세가 어떻게 변동하건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는 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고 하겠읍니다(중략). 무엇보다도 우선 하루 바삐 통일된 민족의 대표기관이 구성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기관은 어디까지나 민주적 자주적 평화적 방식에 따라 구성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직 이 과업을 원칙에 따라 수행하는 것만이 우리 아나키스트의 이념을 살리는 길이 아니겠읍니까(하기락저 ‘탈환’ 241쪽)
유림이 ‘추도사’를 통해 비판한 해방정국은 해를 넘긴 1946년에 접어들어 이른바 탁치시비를 도화선으로 더욱 혼란에 빠져들어갔다. 우익은 비상국민회의(2월 1일)를 결성한 후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민주의원(2월 14일 개원)에 그들의 지도급 인사들을 파견하였다. 반면 좌익은 그들대로 민주주의민족전선(약칭 민전, 2월 15일) 결성대회를 열어 우익에 맞서 나갔다.
1946년 2월 21일, 22일 부산 시내 금강사에서 열린 경남북 아나키스트대회는 이같은 해방정국의 혼란을 아나키스트의 시각에서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토의하기 위한 성격의 긴급집회였다. 유림을 비롯, 서울에서도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참석하여 열띤 논의를 벌였던 이 대회 이틀째엔 다음과 같은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원칙에 의거하여 과도정권이 수립될 것을 요구한다.
-, 정부수립은 일체의 외세의존을 배제하고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방법으로 수행되어야 한 다.
-, 정부는 통일된 민족의 기반 위에 세워져야 한다.
-, 정부수립은 지방자치의 확립과 불가분하게 병행되어야 한다.
현재 정부수립을 지향하는 두 개의 집단 즉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주의민족전선은 위의 세가지 원칙에 비추어 볼 때, 비자율적이고 비통일적이며 비민주적이라고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가들은 이미 그들의 무능을 완전히 드러내고 만 것이었다.
이제 남은 길은 오직 하나 뿐이다. 조선아나키스트들은 동포 국민대중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한다. 각 시, 읍, 면은 자발적으로 그 자치제를 구성하고, 그들의 대표자로 하여금 국민대표자회의를 구성할 권리를 행사하자. 그리하여 이 기관으로 하여금 과도정부를 구성 또는 선택할 권리를 확보하자. 이 원칙과 이 방법에 의하여 수립되는 과도정부만이 자주적 민주적 통일적 정부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부이다.
하기락, 김지병, 이동순, 손조동, 박영환 등이 문안작성위원으로서 공동작성한 이 성명서를 통해 당시까지만 해도 임정 국무위원의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던 유림이 같은 임정측 요인들이 대거 참가했던 우익의 비상국민회의를 어떻게 비판하고 있었는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부산에서 경남북 아나키스트 대회가 열린 두달 뒤 경남 안의에서는 전국 아나키스트대회가 열렸다(1946년 4월 20~23일). 이 모임에는 조선무정부주의자총연맹의 서기부 총무위원 유림, 자유사회건설자연맹의 이을규, 정규 형제를 비롯, 상당수의 아나키스트들이 대거 참석하였다(그 무렵 대부분의 아나키스트들은 이 두 연맹에 이중으로 가입한 형편이었다).
이 안의대회의 커다란 특징은 한국의 아나키스트들이 스스로의 정당을 조직,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펴나가기로 결의한 데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정치활동(정당운동)에 대해 무관심 내지 냉담한 입장을 보여 왔었다. 아나키즘의 일반적인 이면이 그러했을 뿐 아니라, 특히 일제 치하에서 정당운동이란 무의미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독립운동 그 자체가 차원 높은 정치운동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더욱이 민족분단을 눈앞에 둔 해방정국의 혼란상을 겪으면서도 아나키스트라 해서 팔짱을 끼고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이리하여 안의대회에서는 • 정부수립에 대한 아나키스트의 태도와 원칙 •아나키스트 진영의 전열정비에 관한 문제 등 크게 보아 두가지 의제를 놓고 사흘간에 걸쳐 진지한 토의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대회 마지막 날에는 해방된 이 땅에 설립된 정부는 자주적, 민주적 통일정부여야 한다는 당위적인 명제를 거듭 확인하고, 이같은 통일정부를 세우는 데에 아나키스트 진영이 어떻게 조직을 가다듬어야 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노동자 농민의 조직된 힘을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정당의 필요를 인정한다. 정당에 참여하는 것은 연맹원 각자의 자유 의사에 맡긴다. 정당에 참여하지 않는 동지들은 사상으로써 정치활동에 협력한다. 앞으로 조직될 정당은 본대회가 설정한 기본원칙에 따라야 한다(하기락저 ‘탈환’ 234쪽).
안의대회의 결정이 있고나서 채 80일이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아나키스트들이 주축이 된 독립노농당이 탄생하였다. 1946년 7월 7일 서울의 필동 역경원에서 가진 창당대회에는 유림이 당수 격인 위원장에, 그를 포함, 이을규(재중국무정부주의자연맹), 양일동(동경동흥노동동맹), 이시우(동경 흑우연맹), 신재모, 방한상(이상 대구 진우연맹)이 동당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당의 성격, 노선을 가늠할 수 있는 당강을 살펴보면-.
-. 본당은 국가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하여 투쟁한다.
-. 본당은 농민, 노동자, 일반근로대중의 최대복리를 위하여 투쟁한다.
-. 본당은 일체 독재를 배격하고 진정한 민주주의의 국내외 세력과 평등호조의 원칙에 의하여 합작한다.
독립노동당은 그 ‘창당 선언’에서 ‘국가란 것은 인민의 복리를 위해서만 존재의의가 있거니와, 인민의 복리는 인민 자신만이 가장 잘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것이 불문의 철칙’임을 확인하면서 ‘포악한 일제 통치하에서 가장 가혹한 착취를 당하면서도 이 땅을 지키고 이 땅 위에 모든 것을 시설해놓은 노동자, 농민, 근로대중은 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요, 새나라를 건설할 유일한 자격자’라고 규정하였다.
나아가 ‘창당선언’은 이제 우리 근로대중은 우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새나라 건설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우리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길이라는 자각에 바탕하여 ‘새나라 건설을 하루 속히 우리 손으로 성취하고 우리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철저히 지켜 나가기 위하여 독립노농당을 결성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처럼 창당대회에서 ‘목청’을 드높인 독립노농당의 위원장으로 선출된 유림은 이후 서울을 비롯, 대구, 부산, 광주, 전주, 대전 등의 대도시와 각 시, 군에 지방당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한편 창당 약 한달 뒤인 8월 3일에는 당 기관지인 ‘노농신문’을 순간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러나 독립노농당은 대중적인 조직과 자금을 갖춘 해방정국의 여타 정당에 견주어 볼 때 오늘날과 같은 조직체계를 갖춘 ‘정당’이라기 보다는 아나키즘을 중심으로 한 소수의 ‘이념집단’이란 인상이 짙었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반탁 단선반대 남북협상반대-
독립노농당은 창당 3개월 뒤쯤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폭동이 일어나고 이것이 영남일대로 확대되자(이른바 10 ·1대구폭동사건) 대구지구당과 중앙당 합동으로 조사단을 구성했다. 이 조사단은 사건 발생원인의 규명과 아울러 폭동의 한 원인인 ‘저질경찰관과 악질 모리배를 철저히 다스릴 것’ 등 나름대로의 수습대책을 마련, 미군정사령관 하지에게 제시한 것으로 알려진다. 당시 유림은 생각했다.
“우리나라는 '해방작업'이 잘못되었다. 8 ·15 직후 좌·우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격화하는 바람에 그만 친일세력에게 철퇴를 내릴 겨를이 없었다. 오히려 이제는 그 친일세력들이 애국적이고 양심적인 민족세력을 위협하는 판이다. 이 민족의 앞날이 걱정스럽다.”
유림의 눈에 비친 해방정국은 한심스러웠다. 어제의 밀정이 가짜 독립운동가로 재빨리 변신하는가 하면, 권력의 구심점을 좇아 이리저리 몰리는 정상배들의 추태는 제쳐 놓더라도 적극적 친일파의 처단을 통한 민족정기 확립이란 지상명제도 좌우대립의 와중에서 흐지부지되어 버리는 모습에서 유림은 차라리 서글픔을 느꼈다.
1946년말에서 1947년에 이르는 해방정국은 10 ·1 대구폭동이 말하듯 여전히 불투명하였다. 그런 가운데에서 남조선과도입법의원(약칭 입법의원)이 1946년 12월 12일 개원되고, 1947년 1월 11일의 하지중장 성명서에 나타나듯 1946년 5월 6일 이래 결렬돼 왔던 미·소 공위가 다시 열릴 조짐을 보이자 독립노농당 위원장 유림은 입법의원과 미 군정을 싸잡아 비난하고 나섰다.
나는 처음부터 모스크바 3외상 결정을 전적으로 거부하고 미 군정의 입법의원도 반대해 왔다. 조선의 자주독립은 대서양헌장을 비롯하여 현대사의 조류에 따른 자명한 이치이므로 신탁통치는 연합국의 자기모순적 처사이다. 항간에는 미소공동위원회가 우리나라 독립의 유일한 길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는 것 같으나 가소로운 일이다. 애당초 출발부터 잘못된 것이므로 공동위원회가 성공할 리 없다. 어째서 우리나라 일을 밖에서 남들이 결정하고 나선단 말인가. 그렇게 하니까 내부에서 추종자가 생겨 서로 대립하는 것이 아닌가.
미 군정의 입법위원이란 것도 마찬가지의 과오를 범하고 있다. 어제 하지 중장도 나와 면담했을 때, 지금까지의 미국의 점령정책이 실패였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한다고 말하고 앞으로 이를 시정하겠다고 다짐했다. 요컨대 근본부터 고쳐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선인의 문제는 조선인에게 자주적으로 처리하도록 맡겨야 하는 것이다.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때에도 그런식으로 하면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조선의 독립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니, 차라리 완전한 독립에 방해가 될 고식책은 하지 말아 주었으면 좋겠다(‘경향신문’ 1947년 1월 15일).
미·소공위에 미련을 갖는 것은 신탁통치에 미련을 갖는다는 것과 다름없다는 게 당시 유림의 입장이었던 듯하다. 한편 그가 입법의원을 반대한 까닭은 앞서 민주의원과 마찬가지로 미 군정의 자문기관이란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판단에서 였다(물론 입법의원은 그 성격상 미국에 의한 ‘조선의 조선인화’의 한 과정으로서 좌우합작을 뒷받침하려는 배경을 깔고 있기도 하다).
1947년 5월 5일 서울의 필동 역경원에서는 독립노농당 제 1차 전당대회가 열렸다. 전국 각지에서 약 3백명의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사흘간에 걸쳐 열린 전당대회는 중앙집행위원장에 유림을 그대로 유임시키고, 부위원장에 박열, 이을규, 중앙감찰위원장에 원심창 등 일부 당 간부를 새로이 선출하였다. 아울러 그 무렵 우리 국민의 최대 관심사였던 단선문제를 비롯, 제반문제에 대한 독립노동당의 입장을 확인하였다.
이 전당대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1. 미 군정의 보통선거나 남조선 단독정부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1. 미소공동위원회가 신탁통치를 논의하는 한 이에 참가하지 않는다.
1. 모든 독립운동역량을 국민의회에 집중하여 기존 임시정부를 개편 강화하여 연합국의 승인을 요구한다.
위의 결의사항 가운데 세 번째 항목에 기술된 국민의회의 성격을 잠시 살펴보면-. 임시정부 요인들이 주축이 되어, 자주적인 과도정부 수립을 목표로 조직한 비상국민회의의 28인 최고정무위원회가 미 군정 사령관 하지의 자문기관인 남조선 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1946년 2월 14일)으로 개편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에도 비상국민회의는 그대로 명맥을 유지, 창덕궁에 본부를 두고 민주의원과 수시로 합동회의를 개최하곤 했었다.
그런데 1947년 2월 14~17일에 걸쳐 열린 제2차 전국대의원대회에서 의장(조소앙), 부의장(유림)을 각각 뽑은 후, 김구의 제안이 있었다. 비상국민회의를 민족통일총본부, 독립촉성국민회와 통합하자는 제안이었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임정계의 비상국민회의를 주축으로 한 이들 3단체의 합동 결과로 발족되었다. 국민의회의 뿌리는 중경 임시정부에 잇닿는 셈이다(1947년 5월 국민의회는 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
1948년 들어와 어쩌면 남북분단의 고착을 영구화시킬지도 모를 단선이 보다 구체화된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 UN 한국임시위원단이 서울에 들어와 활동을 개시하였고(1월 8일) • 지체없이 총선거를 실시하자는 이승만의 성명서 발표가 있자(2월 3일) • 김구가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피끓는 성명을 통해 남한만의 단정을 수립에 반대하고(2월 10일) • 김구, 김규식이 김일성, 김두봉에게 남북요인 회담을 제의했다(2월 16일). 그러나 UN총회에서는 미국의 제안대로 한국내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 결의안이 통과된 후 (2월 26일) • 주한 미군사령관 하지가 남한 총선거 시행을 발표했으며(3월 1일) • UN 안보이사회에서 미국 대표가 한국의 분할 독립을 주장하자(3월 4일) • 김구는 남북협상을 제의하면서 그 요청서를 북한에 전달했으며(3월 8일) •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 7인의 거두가 공동성명을 통해 5·10 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3월 12일).
당시 독립노동당을 이끌던 유림도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전면적으로 반대하였다. 1948년 봄 그가 발표했던 성명을 일부 인용하면.
남조선 단독선거는 다음과 같은 각 항목의 결함이 있으므로 나와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이를 반대한다.
1. 선거법의 제정과 선거사무집행이 자주적으로 되지 못했다.
1. 조선 전래의 국토를 양분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조선에서도 대다수 국민이 반대한다.
1. 극소수 특권층이 지배하는 결과가 되므로 근로대중의 복리를 보장할 가능성이 없다.
1. 질적, 양적으로 통일정부가 되지 못한다.
1. 자주독립을 무기한 지연시키고 국토분단을 무제한 만성화시킬 가능성이 있다.
1. 골육상쟁의 비극을 연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1. 미·소 대립을 조장하여 국제전쟁을 도발할 가능성이 있다(‘대동신문’ 1948년 3월 16일)
유림이 위의 성명을 통해 주장했듯이 단선이 지난 7개 항목의 ‘결함’ 가운데 ‘골육상쟁의 비극을 연출할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지적은 불행하게도 바로 2년 뒤에 현실로 나타났음은 잘 아는 일이다. 이 무렵 유림은 남한만의 단독선거반대운동의 전면에 나서서 부지런히 뛰어 다녔다. 그러한 땀의 열매 가운데 하나가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이다.
3월 25일 밤 평양방송이 이른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 연석회의를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개최하자는 북한측의 요청을 보도한 바로 다음날 유림을 주축으로 한 엄항섭, 여운홍, 홍명희, 김붕준 등은 ‘전민족의 정치적 역량을 결합’할 것을 주장하면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발기취지문을 각계에 띄워 보냈다. 이리하여 4월 3일 서울 필동 역경원에서는 동협의회의 결성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발표된 ‘선언’을 일부 인용하면-.
향자에 민족진영의 지도자 7인이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단선 반대의 기치를 분명히 세웠으나 분산된 세력을 집결한 기구가 있어야 투쟁이 커질 것이다. 이 기구를 갖추려는 초보공작으로 우리는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발기하였다. 동지여 함께 집결하여 함께 투쟁하자. 개인의 이해화복으로 민족의 운명을 그르치려는 모든 책략을 분쇄하고 평화의 길로 전진하자(송남헌저 ‘해방3년사’ 제2권 548쪽).
이 ‘선언’에 나타난 ‘민족진영 지도자 7인의 공동성명’이란 동 협의회의 결성대회가 열리기 약 20일 전인 3월12일,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조완구, 홍명희, 조성환 등 7인이 5 ·10 선거를 반대한다고 발표한 성명서를 가리킨다. 이 공동성명에서 이들 7인의 민족지도자들은 ‘반쪽이나마 먼저 독립하고 그 다음에 반쪽마저 통일한다는 말은 일리가 있는 듯하되 실상은 반쪽 독립과 나머지 반쪽 통일의 가능성이 없고 오직 동족상잔의 참화를 격성할뿐’이라고 경고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개개의 이익을 도모하려고 민족의 창사를 추진하는 것은 민족의 양심이 허락지 아니하며, 반쪽 강토에 중앙정부를 수립하자는 가능한 선거에는 참가하지 아니한다. 그리고 통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하여 여생을 바칠 것을 동포 앞에 굳게 맹세한다’고 비장한 결의를 밝힌 바 있다.
한편 유림을 대표간사로 선출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 결성대회에서는 •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을 집결함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도모함 • 민족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이란 세가지 사항을 동 협의회의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기본 입장의 일치에도 불구, 통일독립운동자 협의회는 그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된 까닭에는 당시의 국내 정치상황이 결국에는 단선으로 치달은 탓도 있지만, 동협의회의 대표간사였던 유림이 남북협상, 보다 정확히는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하길 거부한 데에도 그 원인이 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면 38선을 베개 삼아 자결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4월 19일 아침 북행하려는 백범 김구의 옷깃을 붙잡고 유림은 이렇게 말했다.
“백범 선생, 가지 마시오. 가시면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백범선생이 독립운동을 하니까 백범선생이지, 신탁통치 찬성자들과 무엇을 협상하자는 것입니까? 그들의 속셈을 모르십니까?”
- 제헌의회 불침과 반독재 민주화운동-
민족의 통일된 정부를 열망하는 다수 국민들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제헌의원을 뽑는 5 ·10 선거가 드디어 치러졌다. 이 단선에 불참한다는 게 유림이 이끄는 독립노농당의 공식노선이었다. 그러나 일부 당원들은 무소속 혹은 각종 사회단체 명의를 빌어 입후보하여, 신현상(공주), 장홍염(무안), 정준(김포), 육홍균(선산), 최석홍(영주) 등이 당선돼 금배지를 달았다.
당시 독립노농당에 관계했던 한 인사의 말에 따르면, 독로당계 당선자는 29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이같은 숫자라면 독자적인 원내교섭단체를 구성, 하나의 파워집단을 이룰 수 있는 규모다. 그러나 독로당 당수 유림은 이들을 모두 제명처분하고 말았다. 바로 훗날 통일당 당수로서 70년대 유신정국의 한 모서리에서 나름대로 투쟁하였던 양일동도 이때 독로당을 떠난 것으로 알려진다.
1948년의 5 ·10 선거에 불참한데다 독립노농당 계열의 국회의원들을 제명한 후부터 유림그룹의 세력은 약화일로를 걸어갔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현실정치에 적극 참여함으로써만 그 존립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정당이 선거를 외면하고 당선자마저 제명한데서 독로당의 조락은 뻔히 내다볼 수 있는 것이었다. 1950년의 5·30 선거 당시 독로당 후보로서 출마한 유림은 무소속의 김익기와 아슬아슬한 시소게임을 벌였다. 그러나 투표함 뚜껑이 열리자 김후보가 1만 3천 68표를 얻은 반면 유림은 9천4백38표를 얻어 낙선의 쓴 잔을 들이켜야 했다(그러나 같은 중경 임정국무위원 출신인 조소앙은 서울 성북구에서, 장건상은 부산 을구에서 다득표순위에서 전국 1, 2위를 기록하였다).
5·30 선거를 치른지 한달도 못돼 6 ·25가 일어나자 ‘수도 서울 사수’라는 이승만의 녹음테이프에 속아 넘어간 상당수의 요인들이 적치하에 그대로 남겨지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에서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을 지냈던 사람들, 이를테면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엄항섭 등이 끝내는 납북되는 비극이 연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유림은 트레이드마크인 카이제르 수염을 깎고 변장한 채 한강을 건넜다. 임정 국무위원 가운데 6 ·25 사변 발발 직후 몸은 빼쳐 피난을 간 사람은 유림 혼자뿐인 것으로 알려진다(장건상, 김성숙 같은 이들도 적치하의 90일간 여기저기 숨어다닌 끝에 납북을 면했다).
아무튼 6월 30일쯤 대전에 닿은 유림은 공개적으로 이승만 정권을 비난하였다.
“수도 서울을 공산당에 넘겨주면서 자기네만 먼저 살짝 빠져 나와 시민들을 희생시킨 책임을 이대통령은 느끼고 있는가? 책임을 느낀다면 왜 한마디의 사과말도 없는가?”
전시 하에서 이처럼 수위 높은 발언이 무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로 인해 약 3개월 가량 재판 없는 옥살이를 감수해야만 되었다.
부산 피난시절 유림은 그곳 김창욱 변호사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1952년 5월 26일 47명의 현역 국회위원들이 탄 통근버스를 헌병대의 견인차가 끌고간 이른바 부산정치파동을 겪은 후 해공 신익희가 유림을 찾아왔다. 제정당 사회단체들을 모아 반이승만의 범국민운동을 일으켜 보자는 제안이었다. 중경 임시정부 시절에 유림과 절친했던 신익희는 이렇게 간곡히 말했다.
“단주(유림의 아호), 우리는 과거 친한 동지 사이요,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생사를 같이 한 사이 아닌가? 이제부터 힘을 합쳐 독재자의 손길에서 구민운동을 해보세.”
신익희의 말을 다 듣고난 유림은 상기된 얼굴로 이렇게 맞받았다.
“그래, 해공! 자네는 이승만 앞에서 기생첩 노릇을 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래 내가 이승만의 첩하고 타협을 해? 차라리 구민타협이라면 이승만하고 하지.”
이같은 유림의 질타는 신익희가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수립에 협력, 국회의장에 올랐던 것을 비판한 것이지만 옆의 사람들도 면구스러울 정도로 땀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원래 말술을 사양 않듯 대인의 풍모를 지닌 신익희는 그저 “허허” 하고 웃으면서 “단주, 과거는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었네. 용서하시게.”라고 달랠 뿐이었다. 그러나 유림은 이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동지고 팥죽이고 간에(신익희가 ‘과거의 동지’ 운운한 점을 비꼰 얘기임) 기생첩과 같은 사람과는 타협할 수 없네.”
유림의 고집스러울 정도의 결벽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같은 민족끼리 서로 할퀴고 싸운 6 ·25의 포화가 스러진 50년대 중반 유림은 독립노농당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약체화된 당세를 만회하기란 쇱지가 않았다. 1958년 5월 2일의 4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대구을구에서 입후보한 유림은 겨우 1천4백27표를 얻었을 뿐이었다(당선자인 민주당 후보 이병하는 1만5천6백21표 획득).
4·19의 젊은 함성이 일자, 그 무렵까지도 독립노농당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사태를 관망하던 67세의 유림은 그 삶의 마지막 시기를 다시금 바쁘게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노독재자 이승만이 물러나자 유림은 장건상, 정화암, 김창숙, 조경한, 김학규, 권오돈과 더불어 혁신동지총연맹의 구성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다. 5월 12일 발표된 이들 7인의 공동성명은 ‘이 땅에 참된 민주체제를 확립하여 남북통일을 빨리 성취하고 지름길로 뛰어가 선진제국 앞에 나설 목적으로’ 혁신동지총연맹을 발기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혁신계의 대동단결을 통해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기려는 이들의 시도는 그리 쉽지가 않았다. 혁신계의 주류는 사회대중당으로 몰리고, 정화암 등도 사회대중당으로 옮겨갔다. 유림은 장건상, 권오돈, 최천택, 박석홍과 더불어 5인 공동대표위원의 한사람으로서 혁신 동지총연맹을 이끌며 1960년의 7 ·29선거 당시 연고지인 안동을구에 입후보하였다. 동연맹의 공천으로서였다. 상대 경쟁자는 민주당의 박해충, 그러나 1950년의 5 ·30 선거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림은 은메달에 그쳐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박해충 1만5천4백13표, 유림 6천1백6표).
7·29 선거 직전 서울 동숭동의 서울 문리대 강당에서 많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 이념과 현실의 조화문제에 대한 강연, 뜨거운 박수를 받은바 있는 유림도 7·29 선거에서 패배한 후로 건강이 나빠져 갔다. 그 무렵 유림을 만난 적이 있는 송남헌씨(72세 · 당시 통일사회당당무위원장)의 회고에 따르면 ‘선생은 매일 자신의 팔에 직접 영양주사를 놓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좋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서울 제기동에서 식사를 마련해 주는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살던 그의 살림형편은 무척이나 쪼들렸다. 1961년 4월 1일 낮 12시 그가 마당에서 나무를 심다 심장마비로 서거한 바로 그 시각, 가정부는 쌀을 마련하려고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멀리 만주벌판에서, 또한 분단된 이 땅의 한 모서리에서 70 가까운 생애를 통해 순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그가 삶을 마감할 때엔 아무도 그 곁을 지켜보지 못했다. 4월 7일 수유리 묘소로 향하기 직전 시청앞 광장에서 치러진 사회장만큼은 3천여명의 조객이 참가했으나...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된 시점은 1962년 군정 하의 3 ·1절 기념식에서였다.
-영원한 지조인-
유림의 사전에 ‘타협’이란 말이 없었다. 오늘의 정치인들이 즐겨쓰는 ‘협상’이란 말도 없었다. 더구나 옳지 않다고 일단 판단한 것과의 타협이란 있을 수 없었다. 그 예가 외아들 유원식과의 관계에서 너무나 극적으로 드러난다.
외아들 유원식은 5·16 군사쿠데타 직후 구성된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최고위원 가운데 하나로서 현역 육군대령의 신분으로 1962년 당시의 통화개혁에 적극 참여한 인물. ‘사전 내통설’을 둘러싸고 그와 윤보선 전 대통령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뚜렷한 결말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그런데 유림은 1945년 12월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후 1961년 4월 서거할 때까지 외아들 원식을 만나주지 않았다. 유원식이 일본군 고급장교를 지냈다는 이유에서였다. 바로 당사자야 생각이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일본군 고급장교라면 그 직위의 속성으로 미루어 만주, 중국에서 우리 독립운동자들을 색출, 고문하던 일제 침략의 첨병노릇까지도 해냈던 위치였음은 사실이다. 아나키즘의 이론가이자 독립노농당 핵심간부였던 전 경북대교수 하기락씨(74세 ·현 계명대 강사) 는 6 ·25 사변 당시 유씨 부자간의 비극적 만남(?)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6 ·25 사변 초기 포항지구에서 벌어진 전투는 치열하기로 유명합니다. 당시 포항지구전투에선 누구라도 생명을 바칠 각오를 해야 될 정도였지요. 그때 연대장으로서 이 전투에 참여하게 된 아들 유원식은 마지막 한번만이라도 부친을 만나 보려고 대구로 왔어요. 마침 유림선생은 우리집 사랑방에 기거하고 계실 때입니다. 외아들이 찾아왔다는 얘길 들은 유림선생은 등을 바깥으로 향하곤 아들을 쳐다보지 않습디다. 끝내 유원식은 부친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울며 그냥 돌아가고 말았지요.”
이미 고인이 된 양일동(전 통일당 당수, 1980년 작고)은 언젠가 유림을 회고하는 자리에서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만일 유림선생이 살아계실 동안 그 아들 원식을 대면하고 여러 가지로 이끌어 주셨더라면, 적어도 유원식 대령이 5 ·16엔 가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유림은 아들뿐 아니라 부인 이난이도 만나주지 않았다. 남편이 혼자 중국에서 독립운동하는 동안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해 일제의 앞잡이로 만들었다는 책망에서였다. 1946년 부인이 죽었을 때 유림은 장례식에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그를 가까이 모시던 측근자가 ‘선생님,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하고 알렸다. 그러나 유림은 들은 척도 안하고 눈 한번 깜짝하지 않으며 신문을 읽어내려 갔다.
그는 입버릇도 이렇게 말했다.
“나는 개인적으로 살기 위한 유림이가 아니라, 이 나라 이 민족 때문에 살고 있는 유림이다. 내가 가정에 얽매인 유림이냐?”
유림은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도 엄격하였다. 1945년 12월 귀국한 이래 그는 온돌방에다 어깨를 대지 않았다. 군인들이 쓰는 야전용 철침대를 마루방에 두고 거기에서 잤다. 그 옆에 다다미 두장을 펴고 옹기 그릇에 숯을 몇 개 넣고는 손님이 오면 불을 지피고 혼자 있을 때는 그냥 추위를 참으며 지냈다.
이처럼 유림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나칠 정도의 <결백성>을 유지했던 몇 안되는 이들 가운데 하나다. 그러기에 그는 일생을 고집과 비타협적인 태도, 부정과 비판으로 일관하였다. 망명생활의 식민지시대에는 일제에 대하여, 해방된 조국에선 이승만정권에 대하여 그는 쉼없는 비판, 부정으로 저항하였다.
그의 일관된 부정의 비판 정신은 그밖에 그가 옳지 않다고 판단한 모든 사물, 집단, 인간에게 치열하게 꿈틀댔다. 그래서 때로는 무리가 뒤따랐고 유림을 존경하고 따르던 이들도 원칙론에 입각한 그의 지나친 비타협적인 태도 때문에 그의 정치적 말년이 불우하게 끝맺었음을 아쉬워하고 있다.
남들로부터 ‘독불장군’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고독한 외길을 걸으면서도 유림이 끝까지 부정의 비판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식민지시대, 분단시대의 가시밭길을 헤쳐 나가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어느덧 배어버린 나름대로의 <신념>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그런 체득의 신념이 바로 이 민족의 완전한 독립, 통일, 그리고 이승만, 김일성으로 대표되는 남 ·북한의 강제적인 권력을 배제한 이상적인 자유사회 건설을 향한 것이라면, 비록 유림이 지닌 일면의 한계와 이에 따른 오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우리 시대에 여전히 소중한 인물이다. 이해득실에 사람들이 익숙해 있는 오늘날 유림과 같은 고집스런 지조인은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 후기: 위의 글에 인용된 성명서,강령 등의 자료는 하기락, 최갑용, 이창근씨의 도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지면을 빌어 감사드린다.
김재명, ‘정경문화' 1986년 1월호 pp. 386~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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