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기의 독립 운동과 중국망명-


평민에 대한 터무니 없는 착취로 대표되는 봉건왕조의 모순이 끝내는 곪아터져, ‘제폭구민, 척외양창의'란 반봉건, 반외세의 깃발이 드높던 1894년 그 해 5월, 유림은 경북 안동군 월곡면 계곡리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안동댐이 들어선 까닭에 수몰되어 버렸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그의 생가가 보존되어 있었다. 부친 유이흠은 그 지방 일대에서 꽤나 행사하는 대지주로서 부인 의성김씨 사이에 아들 셋을 두었다. 그런데 맏아들 만영, 차남 돈영이 다른 인척의 양자로 갔기에 막내 유림(당시의 이름은 화영)은 자연히 대지주로서 글줄이나 읽는 전주 유씨 집안의 장남이 되었다.


그 무렵의 다른 이들이 대체로 그러했듯이 유림 소년은 서당에서 한문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의 소년시절이라면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 이 땅의 사람들이 봉건적 권력자의 무능, 부패, 외세 의존 때문에 바야흐로 제국주의 일본의 손아귀에 꼼짝없이 휘어잡혀 그 몇십년 후에는 성씨까지 갈아야 할 운명이 멀지 않은 시점이었다.
13세에 이난이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대지주의 대를 이을 도령으로서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었을 유림소년도 그 시대의 암울한 먹구름을 피부로 느꼈을 듯하다. 이러한 추론은 그가 17세 때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에 관한 조칙, 조유 및 합병조약문이 공포되자, 손가락을 끊어 '충군애국'이란 넉자를 혈서로 쓰고 국권회복에 몸바칠 것을 다짐했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그의 정신적인 스승은 고향의 한학자이자 우국지사인 동산 유인식으로 알려진다. 유인식은 유씨의 문중의 어른으로서 유림이 한낱 부잣집 도령님으로서 나약하게 글만 파거나, 아니면 기방에 출입하면서 '소년행락'에 자칫 젖어들기 쉬운 연령의 그에게 건전한 민족의식을 불어 넣어준 인물이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7세의 나이로 혈서를 쓴 이래 3 ·1운동직후인 1919년 봄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유림은 인근 안동, 대구 지역에서 청년들을 규합, 일종의 비밀결사들을 통해 국권회복에의 의지를 나름대로 불태웠다. 안동에서는 정진택을 비롯한 청년들과 더불어 부흥회를 결성하였고, 대구에서는 김용하 등과 더불어 자강회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때 유림은 일본 경찰에 체포돼 시달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22세 되던 해인 1915년의 일이다(피체 당시 그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갇혀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이 민족의 자존을 위한 거대한 외침인 3 ·1운동이 일어났다. 이제는 나름대로의 강한 자의식을 갖춘 26세의 청년 유림은 향리인 안동지방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한 후 가산을 정리, 식솔을 이끌고 만주로 떠나갔다. 식솔이라 해야 모친과 부인, 그리고 어린 아들 원식(당시 4살)이 전부였다. 당시는 이미 부친 이흠이 사망했기에 그가 집안의 가장이었고, 따라서 북행의 결단에 따른 가산의 처분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드넓은 만주에서 유림이 자리한 곳은 봉천성 요중현이었다. 드넓은 광야가 펼쳐진 이 요중현에서 그는 갖고간 거금으로 토지를 매입, 만주로 이주해 온 동포들과 함께 경작해 나가면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하였다. 아들 유원식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유림이 매입한 토지는 '하루 종일 걸어도 남의 땅은 밟지 않아도 될 정도로' 상당한 규모에 이르렀다고.
그러나 얼마 후(1919년 말에서 1920년 초로 추정) 유림은 그 토지들을 모두 매각 처분, 막대한 군자금을 마련하자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봉천성을 떠났다. 남만주 요령성 유하현의 삼원보를 향해서였다. 당시 그곳에서 이상용, 이회영, 김동삼 등이 중심이 되어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의 총본영 격으로 조직한 서로군정서가 웅거하고 있었다.
서로군정서에 합류한 유림이 구체적으로 어떤 부서에서 활동하였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군자금 모금을 위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되지만, 서로군정서의 비밀특파원 격으로 국내를 두 번에 걸쳐 잠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고향에 일부 남겨둔 토지를 모두 처분한 것도 바로 이 때의 일이다.


그러나 점차 조직을 확대해 나가던 서로군정서는 뜻하지 않은 시련에 부딪치게 되었다. 1920년 8월 하순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일본군 19사단이 남하하고, 나남에 주둔하던 21사단이 두만강을 건너 북상하는 한편 만철 수비대가 송화강을 건너 서진, 협공을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구한말 이래 만주에서 세력을 키워 나가던 한국인 무장조직들에 대한 일본군의 대규모 작전이었다.
이같은 중대국면에 처하여 이상용을 비롯한 서로군정서의 리더들은 일단 적의 예봉을 피하기로 결정했다. 군인 5백명으로 교성대를 편성, 지청천(일명 이청천)의 지휘 하에 안도현 삼림으로 보내고, 서로군정서의 각 기관은 액목현으로 이동하는 동시에 비무장 청년들을 각지로 분산시킨다는 결정이었다(안도현으로 이동한 교성대는 그해 1월 청산리싸움을 승리로 매듭짓고 퇴각하는 김좌진의 북로군정서 부대와 영안 지방에서 합류, 새로운 전투부대를 편성했다).


이같은 배경에서 유림은 북경으로 내려갔다. 앞뒤 사정을 가늠해볼 때 그 시기는 1920년 말로 추정된다. 이제 28세의 청년인 그는 북경에서 독립운동의 대선배인 신채호, 김창숙, 김정묵, 남형우 등과 더불어 순 한문의 월간지 ‘천고'를 펴내는 데 한몫 거들었다. 1921년 1월에 창간호가 나온 이 잡지의 논설은 대부분 단재 신채호가 집필하였는데, 주로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을 폭로하면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과 항일무장투쟁의 필요를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천고'가 순 한문으로 발간된 까닭은 한국인은 물론 중국인들에게도 읽히려는 데 있었다.
흔히 곤궁함 속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고 비록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더라도 현실과는 타협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것과는 함께 자리를 하지 않는 '고집스러울만큼의 결벽성'을 보여준 이로 단재 신채호와 심산 김창숙을 꼽는다. 훗날 유림이 보여주는 일련의 비타협적인 고집은 위의 두 선배에 결코 뒤지지 않을 듯하다.
이같은 측면은 그가 '천고' 간행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신채호, 김창숙으로부터 어느 만큼의 영향을 입은 데에서도 비롯된다고 한다면 비약일까.


-아나키즘 수용과 성도대학 수학-


고국을 떠나 중국에서 활동한지 3년이 지나갈 무렵 29세의 청년 유림은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확고한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은 듯하다. 더구나 국권 회복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이상, 젊은 시절에 이념적인 토대를 보다 철저히 다질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1922년 국립 성도대학 사범부 문과에 입학, 4년간에 걸친 기간동안 그는 독립운동의 이념적 토대를 닦아 나가면서 나름대로 미래의 실천활동을 그려나갔다. 이 무렵이 그로서는 해외망명 기간중 비교적 여유있는 시간을 보낸 셈이다.
일종의 '재충전'에 해당하는 대학 재학 동안 유림은 점차 아나키스트로서의 사상적 입장에 기울어져 갔다. 그가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게 된 데에는 물론 그 당시의 시대적 흐름 탓도 있겠으나, 단재 신채호의 영향도 결코 배제할 수 없을 듯하다. 단재는 북경에서 채원배, 이석증 등 이른바 '파리그룹'의 중국인 아나키스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아나키즘에 기울던 터였다.
그러나 유림은 1924년 4월말 북경에서 이회영, 이을규, 이정규, 백정기, 유자명, 정화암 등이 창립연맹원으로서 결성한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 연맹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 무렵 그는 북경에서 멀리 떨어진 성도대학에 재학중이었기 때문이다. 북경 교외의 암자에 틀어박혀 사고전서를 섭렵하며 역사 편찬에 몰두하던 신채호도 유림과 마찬가지로 동 연맹의 창립 모임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1926년 초 성도대학을 졸업한 유림은 봉천으로 돌아와 부인 이난이씨가 경영하는 여관에서 잠시 쉰 후 견문도 넓힐 겸 독립운동의 대선배들을 찾아 운동방략에 대한 고견을 묻기 위해 광동, 상해, 남경과 무한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일종의 모색기랄 수 있는 이 기간 동안 그는 국민당 좌파의 여러지도적 인물들과 진독수, 진형명 등 진보적인 인물들을 찾아가 당면한 문제들을 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북경대학 총장인 채원배도 만났다. 중국인 아나키스트 그룹의 핵심인물인 채총장으로부터 유림은 약소민족의 독립운동 방략에 대해 여러 가지로 시사를 많이 받았다.
한편 이 무렵 유림은 상해에서 한글학자인 김두봉(훗날 북로당 위원장), 신채호가 '한글말본' '조선말본' 등을 저술하는 데 한몫 거든 것으로 알려진다.


-만주의 무장항일운동 참여-


성도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 해(1926년)로 추정되지만, 유림은 앞서 살펴본 바처럼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다 다시 만주로 향했다. 독립운동 선상에 있어서 일제 침략의 손길과 직접 마주닿는 만주의 무게를 깊이 가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의 발길이 머문 곳은 남만주 길림성에 자리한 정의부였다.
당시 만주에서는 우리의 무장독립운동단체들이 대체로 서간도 중심의 참의부, 소만국경 가까이의 신민부와 더불어 길림의 정의부의 3부로 나누어져 대일항쟁을 펼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정의부는 서로군정서를 비롯, 남만주 일대의 항일 무장조직들이 보다 효과적인 항일투쟁을 펴나가기 위해 모여 만든 통군부(1923년 6월)가 결성 2개월만에 통의부로 확대 발전된 뒤, 다시 재만통일회준비회(1924년 7월)를 거쳐 1925년 1월에 결성된 남만주 최대의 독립운동단체였다.
‘인류 평등의 정의와 민족생영의 정신으로써 조국독립의 대업을 완수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헌장을 내건 정의부는 결성 • 당시 지방의 치안유지를 위해 무장대를 두고 • 통치구역은 당분간 하얼삔, 액목, 북간도의 선을 그어 그 이남의 만주 전부로 하며 • 세입으로 1년에 호당 6원과 별도의 소득세를 부과키로 의결했다.


이 정의부의 지도적 인물로는 중앙행정위원인 이탁(만주사변후 변절), 오동진, 지청천(일명 이청천), 현정경, 군사조직의 리더인 참모장 김동삼 등이었다. 특히 김동삼(1878년생)은 한일합방 직전 안창호, 신채호, 이동녕, 양기탁 등이 조직한 비밀결사 신민회에 참여한 후 1911년 만주로 건너온 이래 경학사(사장 이철영), 부민단(초대단장 허혁, 2대단장 이상용), 서로군정서(독판 이상용), 신흥무관학교(교장 이시영) 등에 모두 참여한 경력이 말하듯 ‘남만주의 호랑이’였다. 1929년 11월 하얼삔에서 체포된 후 1937년 서대문 감옥에서 옥사하기까지 그는 오로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한몸을 순난의 길로 기꺼이 몰고간 인물이라 하겠다.


길림성 화전현에 본부를 둔 정의부는 항일 무장투쟁을 지속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문화기관, 특히 교육시설의 확충에 주력하였다. 이를테면 각부락에 소학교를 세워 초등교육을 의무적으로 실시하였고, 홍경현에 화흥중학, 유하현에 동명중학, 정의부 본부가 있는 화전에는 최동오를 숙장으로 하는 화성의숙을 세워 인재를 길러냈다.
당시만 해도 대학 졸업자가 드물었던 만큼 유림은 주로 교육관계의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앞뒤 살펴보아 과장되고 잘못 기술된 부분이 여럿 나오는 자료이기에 제대로 보기는 어려운 ‘유림선생약전’(단주선생기념사업회 편)이란 팸플릿에는 유림이 정의부의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팸플릿에 따르면 또한 그는 재만 한인교육회를 조직하고 교과서 편찬과 교원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929년 3월 하순 유림은 만주 무장독립운동의 큰 별인 백야 김좌진을 만난 일이 있다. 그 사정은 이러하다.
1926년 초 이회영의 집에서 그와 더불어 교과서적인 ‘아나키즘 문답’(정화암선생에 대해 기술한 ‘정경문화’ 1985년 12월호 403~404쪽 참조)을 나누었던 시야 김종진은 운남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1928년 만주에서 신민부를 이끌던 인척뻘의 김좌진을 찾아갔다. 이미 아나키즘을 자신의 이념으로 수용하고 있던 김종진은 김좌진으로 하여금 당시 상해, 남경 등지에서 활동하는 아나키스트들과 손을 잡고 신민부를 확대 발전시키도록 설득했다.


이리하여 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1924년 4월)의 핵심인물인 이을규가 만주로 오고 1929년 봄 신민부는 재만 한족총연합회(일명 한족자치연합회)가 개편되었다.  김좌진은 동 연합회의 우두머리인 위원장에, 김종진은 조직선전부를, 이을규는 교육부를 각각 맡게 되었다.
이미 아나키즘의 입장에 서있던 유림은 이을규와 함께 신민부를 향해 출발하려는 김종진을 1929년 1월 길림에서 우연히 만났다. 앞뒤 사정을 듣고난 그는 신민부의 본부가 있는 중동선 해림으로 함께 떠났다. 약 두달 뒤인 1929년 3월 하순 해림에 도착한 3인은 가뜩이나 인재 부족에 고민하던 김좌진 그룹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김좌진은 크게 기뻐하면서 그곳 해림소학교에서 성대한 환영식을 베풀어 주었다. 이로부터 며칠을 계속해서 독립운동 전반에 걸친 기본문제와 당면과제들을 논의하였다. 그런데 이런 자리에서 유림은 김좌진과 논쟁을 벌였다. 그 무렵 만주에서 민족진영과 갈등을 하고 있던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사상적 방어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아나키즘으로라야 막을 수 있다는 것을 유림은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좌진은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궁극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는 무슨 주의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한 데서 격론이 벌어졌다.
(이을규저 ‘시야 김종진선생전’ 86~87쪽)


이처럼 유림, 김좌진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자 이을규, 김종진이 두 사람을 조정하려 했다.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궁극목적으로 민족의 주권을 되찾는 일, 그것에 무슨 주의란 이름을 붙이자면 ‘자유연합을 사회조직의 원리로 하는 아나키즘’이라는 논리에서 두 사람의 이론은 조금도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이에 대하여 김좌진은 더 이상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은 듯 유림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이런 문제는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이 클 뿐 아니라, 단결과 협동이 시급히 요청되는 이 때에 자칫하면 운동자들 자체 내에 혼란을 야기시킬 우려가 없지 않으므로, 비록 동지들 사이에 격의 없는 자리라 치더라도 신중히 다루어야 할 문제이니까 이것은 이을규, 김종진 두 동지의 의견에 따라 연구문제로 하여 보류, 재검토하자(같은 책 87쪽).


이같은 논쟁이 있은 직후 유림은 다시 정의부 본부가 있는 길림성 화전현으로 되돌아갔다. 같은 아나키스트 동지인 이을규, 김종진의 신민부 개편작업에는 참여하지 않은 채였다. 따라서 그가 북만주 해림을 떠나간 후에 그해 7월 그곳에서 조직된 재만 무정부주의자연맹(책임위원 김종진)에도 적극 참여할 수 없었다.
동 연맹에 있던 이강훈, 김야운을 비롯, 김야봉, 이준근, 엄형순, 이붕해, 이덕재 등이 참여하였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결성과 의성숙 설립-


그 무렵의 유림은 국내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흑기연맹(서울), 진우연맹(대구), 아나키즘연구회(경남 안의)등 1925년부터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한 국내 아나키즘 운동은 1920년대 후반 마산, 제주도, 원산, 평양, 안주, 철산, 단천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아나키스트단체를 조직하였다. 이처름 나름대로 세력을 확대해 나가던 국내 아나키스트들은 1929년 11월 평양에서 전조선 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의 개최 준비는 최갑용, 이홍근, 채은국 등이 핵심인물인 관서흑우회가 주로 맡아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전조선 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열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무렵 조산공산당의 조직은 4차에 걸친 검거 선풍으로 거의 괴멸상태였다. 아나키스트그룹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각 지방의 군소 조직들이 검거되거나 탄압을 받고 있는 형편이었기에 전국적 규모의 대회를 연다는 것은 상당한 모험이었다.
대회 일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일본 경찰의 촉각도 기민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평양경찰서는 ‘집회 불가’를 통고해 왔다. 대회 참석차 전국에서 올라온 아나키스트들은 일부는 평양역에서, 일부는 여관에서 체포되어 연고지로 강제추방되었다. 압록강을 건너온 유림도 평양경찰서에 체포되고 말았다. 피체 그때의 사정을 관서흑우회원으로서 그 자신 당시의 일로 29일간 구류 처분을 당했으며 1931년 봄 다시 체포돼 5년형을 복역한 최갑용씨(80세)로부터 들어보자.
“유림 선생은 농군으로 변장하고 그 대회에 참석하려고 압록강을 건너 왔지요. 평양에서 유선생을 만난 나는 채은국 동지와 함께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해하며 그가 시내 모처에 은신하도록 주선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11월 11일로 기억되는데, 이날 결국에는 유선생도 일본경찰에 체포되고 말았지요. 일본놈들은 그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구체적으로 정의부나 신민부 즉 재만한족총연합회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캐내려고 열을 올렸습니다. 당시 유선생은 신경통으로 고생이 심했는데, 피체 소식을 듣고 봉천에서 부인 이씨와 아들 원식(당시 14살)이 평양으로 달려와 면회를 했지요. 결국 법정 구류기한이 다차도록 증거를 못잡은 그쪽(일본 경찰)에서는 유선생을 풀어주었는데, 형사를 봉천까지 딸려보냈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1929년 11월 10~11일 이틀간에 걸쳐 평양에서 열려던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는 아나키스트 동지들이 서로의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채 취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유림을 포함한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평양 근교의 기림리 소나무 숲속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을 결성(1929년 11월 1일), 어려운 가운데에서 이들의 이념을 펴나갈 본격적인 채비를 갖추었음은 특기할 만하다. 유림은 동맹의 결성모임에 참여한 직후 평양경찰서에 체포된 셈이다.
봉천으로 되돌아 온 유림은 1930년말 (혹은 1931년초)부터 1931년 10월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 동맹사건으로 일본경찰에 체포돼 원산으로 압송되기까지 의성숙(혹은 봉천중학)이란 교육기관을 설립, 청년 교육에 힘썼다.


그 자세한 사정은 이러하다. 1929년 11월 3일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혹은 일본경찰의 체포를 피해, 혹은 학교에서 퇴학당한 상당수의 학생들이 남만주로 건너오게 되었다. (1930년 3월까지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학교는 1백 94개교, 참가학생 5만 4천여명, 투옥 5백80여며, 무기정확 2천3백30여명). 이때 유림은 전재산을 기울여 봉천에다 중학교 과정의 의성숙을 설립, 광주학생운동 직후 만주로 건너온 청년 4백여명을 받아들였다(‘동아일보’ 1931년 4월 15일자에는 유림의 학생모집 관련기사가 실려 있다).
의성숙에 입학한 4백여명 학생들의 ‘주머니’를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이니, 학비는 물론 의식주까지 유림의 부담이었다. 그러나 형편은 점차 어려울 수 밖에 없었다. 기숙사에 식량을 공급하는데 있어 쌀이 좁쌀로, 좁쌀이 수수쌀로 조금씩 바뀌어 갔지만 형편은 더욱 나빠져 갔다. 나중엔 유림의 집안에 있던 가구며 옷가지를 내다 팔아야 했다.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으로 벽에 성에가 하얗게 맺힌 냉방에서 부친이 묵묵히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게 아들 유원식의 회고다(결국 유림의 의성숙은 국민당 좌파에서 경영하는 대학 예과 수준의 평단 고급중학과에 병합되고 말았다).


이렇듯 유림이 만주 봉천에서 고투를 무릅쓰고 있는 동안, 국내에서는 1931년 봄 무렵부터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에 대한 일제 검거 선풍이 불었다. 아나키즘 계열의 원산청년회와 관제 노조인 함남노동회 사이에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자,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의 조직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1931년 4월 1일 최갑용(관서흑우회 소속), 조중복(단천흑우회)이 원산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돼 원산으로 압송되었고, 이홍근(관서흑우회), 강창기(단천흑우회), 안봉연(안주흑우회), 이순창(동) 등 모두 8명이 잇달아 체포되었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의 핵심인물인 유림도 무사할 수 없었다. 한창 의성숙으로 고전하던 그가 봉천 자택에서 체포된 시점은 1931년 10월 7일, 원산으로 압송돼 형식적인 심문을 받고는 곧 바로 구속되고 말았다. 그에게 붙은 죄명은 그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 위반죄, 검사의 기소장 일부를 인용함으로써 이른바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동맹사건의 대체적인 윤곽을 짐작해보면-.


피고인 이홍근, 최갑용은 1929년 10월 23일 오후 2시경 피고인 조중복, 임중학 및 당시 만주로부터 평양에 도착하여 있던 피고인 유화영(유림)과 함께 평양 기림리 소재 소나무숲에서 회합을 가졌다. 이상 5명과 함께 공모를 한 무정부주의 사회건설의 목적으로 결사조직과 아울러 그 강령 규약 기초 등에 관하여 종종 협의를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29년 11월 1일 오전 11시경 다시 이상 소나무 숲 속에서 피고 5명이 회합하여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 할 것.
(2) 현재의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지방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건설에 기한다.


이상과 같은 국체의 변혁 및 사유재산제도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강령을 채택 결정하고 피고인 유화영(유림)은 만주 방면을, 피고인 이홍근?최갑용은 관서방면(평양 방면)을, 피고인 조중복, 임중학은 함북 방면을 각각 책임부서로 정하였다.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란 결사를 조직하고 동시에 그 동맹의 규약을 협정하였다(‘독립운동사자료집’ 11·의열투쟁사 816~849쪽 참조).


그때의 사정을 다시 최갑용씨에게 들어본다.
“유림 선생은 나보다 반년가량 뒤늦게 체포돼 원산경찰서로 압송되어 왔지요. 그런데 함흥지방법원 원산지청의 예심에 회부된지 17개월이 지나도록 예심판사의 얼굴 한 번 볼 수 없었습니다. 유선생을 포함, 우리들 피고 9명을 그냥 감옥에 가두어놓고 고생시키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식사를 나눠주는 같은 죄수로 하여금 동지들끼리 연락을 취해선 일제히 단식투쟁을 벌였지요. 그제서야 예심판사 앞에서 심문조사를 꾸밀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서의 기록이 진술내용과 틀려요. 그래서 서명을 거부했지요. 그들은 일방적으로 예심을 종결합니다. 그렇게 해서 함흥지방법원으로 이송된 우리는 최고 6년, 최저 2년의 징역형을 언도받았는데, 이홍근 동지가 6년이고 유림선생과 나는 5년이었지요. 항소를 하니 서대문감옥으로 보냅디다. 그러나 형량은 1심과 마찬가지였어요. 그동안 경찰의 고문과 옥고로 폐렴을 일으킨 안봉연동지가 서대문 감옥에서 30세의 젊은 나이에 옥사한 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픕니다.”


5년형이 확정된 후 유림은 대전감옥으로 이송되었다. 일제시대에 그곳은 특히 사상범, 정확히 말해서 독립운동, 사회운동에 참여한 지사들이 많이 수용되었던 곳이었다. 그런만큼 감옥 내의 규율도 엄격하기 짝이 없었다. 일제는 유림을 회유, 변절자로 만들 속셈으로 이른바 교회사를 시켜 그를 접촉하게 했다. 마침 유림의 외아들 원식이 결핵에 걸려 어느 절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교회사라는 자는 유림에게 이렇게 엉뚱한 수작을 걸어왔다.
“유선생 외아들이 폐병으로 다 죽어가고 있소. 앞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겠다는 서약만 한다면, 외아들의 치료를 위해 유선생을 가석방시키도록 노력하겠소.”
그러나 유림의 대답은 단호했다.
“내 자식이 죽더라도 내가 출소하면 운동을 계속할 것이다. 자식을 팔아 거짓말을 할 수는 없다.”
이같은 태도에 감복한 교회사는 “선생이 밖에 나가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만,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방편으로 독립운동을 안하겠다고 한마디만 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달랬다. 그러나 유림은 “비록 일시방편으로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바른 말을 하고 여기서 죽을지언정, 거짓말을 하고 나갈 수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지조와 강골의 선비 신채호, 김창숙을 닮은 유림다운 인격에서 나온 말이라 하겠다.


-임시정부참여-


원산, 함흥, 서울, 대전 등지의 감옥을 떠돌며 5년간의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영어의 몸으로 지낸 유림은 자유를 되찾자마자 변장을 한 채 만주로 탈출, 다시금 독립운동선상에 뛰어들었다. 그가 44세 때의 일이다.
이로부터 1942년 중경 임시정부에 참여하기까지 약 5년간 유림은 만주일대와 북경, 천진 등지에서 일본군의 대공세로 위축 일로에 놓여있던 독립운동세력의 재편성을 위해 노력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어떠했는가는 정확히 파악되지 못한 형편이다.
1942년 여름 무렵으로 추정되지만, 49세의 유림은 황하를 건너 서남쪽으로 1만리에 이르는 길을 걸어 임시정부가 있는 중경에 도착했다.


그해 10월에 열린 34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그는 노동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아울러 조소앙, 조완구, 차이석, 김상덕, 박건웅 등과 함께 유림은 임시헌장(헌법)의 수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당시 그가 중경의 임시정부에 참여하게 된 배경은 다음과 같다.
30년대까지만 하여도 임정은 그 인적 구성과 실력 면에서 문자 그대로 한국독립운동의 대표적 기구라 하기엔 터무니 없이 역부족이었다. 더구나 잇따른 분규에 따른 파벌간의 갈등도 잇따랐다. 그러나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이 확대되고 독립에의 서광이 비침에 따라 각계각층 독립운동자들의 대동단결이 시급히 요청되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도 체질을 개선, 보수, 급진을 망라한 독립운동자들의 집결체로 점차 강화되어 갔다. 김원봉이 이끌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개칭, 임정 산하의 무장조직으로 옷을 갈아 입거나(1941년 5월), 유림이 임정에 참여하기 위해 중경으로 발길을 옮긴 것은 이같은 배경에서다.
한국광복전선(1937년 8월)을 중심으로 한 민족진영 우파와 조선민족전선동맹(1937년 11월)으로 대표되는 민족진영 급진파가 서로간의 반목을 지양하고 임정의 테두리 안에서 통일전선을 형성, 완전히 힘을 합치게 되는 시점은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전문 7장 62조로 이루어진 임시헌장이 통과되고 임정의 기구가 확충될 무렵이었다.
바로 이 36차 회의에서 종래 6인 이상 10인 이내로 제한하던 국무위원 숫자도 8인 이상 14인 이내로 늘어났다. 이에 따라 유림을 비롯, 김성숙, 김원봉, 성주식, 김붕준 등 비교적 진보적인 인사 5명이 새로 임정 국무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한국독립당 일색이나 다름없던 임정 국무위원회는 문자 그대로 통일전선을 이룩하였다. 여기에 참여한 당파는 한국독립당,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혁명자통일연맹, 해방동맹 외에도 유림, 유자명이 중심이 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등 5개 단체였다. 36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계기로 임정은 ‘민족의 각 혁명정당과 사회주의 각 당이 연합한 전 민족통일전선’에 의하여 수립된 정부로 확대 개편된 셈이다.
36차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통과된 임시헌장의 수정기초위원으로 한 몫하였던 유림은 또한 외교 분야의 일도 맡아 보았다. 외무부 안에 설치된 외교연구위원회의 연구위원으로서였다. 외교연구위원회는 당시 점차로 급박해져가는 국제정세 하에서 ‘외교에 관한 일반 원칙과 정책 및 방침을 연구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1942년 8월 처음으로 조직될 당시에는 장건상, 신익희 이현수, 이연호가 연구위원으로 참여하였으나, 이듬해인 1943년 2월 김성숙, 박찬익, 최동오와 더불어 유림이 연구위원으로서 그 진용을 보강하게 되었다. 유림이 외교연구위원회에 참여할 무렵에야 비로소 임정의 외교활동이 외교활동이 그 체계를 갖추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간‘독립운동사’ 제4권, 임시정부사 859쪽 참조)


한편 1943년 4월에 선전부(초대 선전부장 김규식)가 조직되고 그 산하에 선전위원회가 구성되자 유림은 조소앙, 엄항섭, 김성숙, 신익희, 김상덕 등 14명과 더불어 선전위원으로서 임정의 선전활동에도 참여하였다. 유림은 선전 계획의 수립과 선전 진행방침에 관한 사항 등을 의결하는 선전위원회 위원으로서 또한 국무위원으로서 일본 패망 전야의 중경에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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