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의 정치논단


05 김영천의 아나키즘 정치논단


안경환 교수의 추도사


단주 유림선생 64주기 추도사

 

매년 봄4월 초하루, 우리는 함께 모여 고귀한 이상을 좇아 험난한 인생행로를 기꺼이 받아들였던 한 숭고한 선인의 삶을 반추합니다. 이 세상에 절대권력이 사라지고 만백성이 평등하게 자율과 공조의 정신으로 함께 이끌어 가는, 그런 평화로운 공동체를 꿈꾸던 이상주의자의 숭고한 삶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오늘은 단주 유림선생이 사랑하던 조국 산하와 동포의 애도 속에 떠나신 지 64 돌을 맞는 날입니다.


어김없이 봄이 찾아 왔습니다. 자연의 섭리는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법, 하루의 일기는 오르락내리락 변덕을 부리기도 하지만 계절의 바뀜이라는 대자연의 법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라의 정치 기상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난 해 12월 3일, 우리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의 충격 속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도 결국 정의의 종을 울리며 막을 내릴 것으로 믿습니다.

서기 2025년, 올해는 우리가 대대로 의지해 온 일력에 따르면 을사년 입니다. 흔히‘치욕의 해’라고 말하지요. 지금으로부터 120년 전인 1905년, 강제로 맺은 조약 ‘을사늑약’으로 인해 우리는 자주독립국의 지위를 잃고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했더랬습니다. 그날 이후 을사년은 국치(國恥)의 해로 국민의 뇌리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스산한 날씨나 쓸쓸한 기분을 그리는 순수한 우리말인 ‘을씨년스럽다’는 어휘도 바로 그 을사년 민족의 비극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국민의 투표로 선출된 대통령, 주권자인 국민을 섬겨야 할 상머슴이 주인인 국민을 배신하고 비상계엄령이라 시대착오적 국정 유린을 자행한 망동은 탄핵재판의 최종 결과에 무관하게 또 하나의 을사년 비극으로 후세인은 기억할 것입니다.

내빈 여러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는 새삼 강권통치의 시대와 영원한 작별을 고하는 엄숙한 각오를 다짐할 것입니다. 이민족의 지배 아래 동포와 산하가 신음할 때 용감하게 국권회복 운동의 전선에 나섰던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을 되새깁니다. 아울러 그분들의 가족이 겪어야 했던 간난과 시련에도 깊은 경의를 표해야 할 것입니다.

1920년 봄, 재중국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동아시아의 동지들과 연합하여 만든 단체의 하나로 삼이협회(三二協會)가 있었습니다. ’‘삼이’는 ’삼무이각(三無二角)‘의 줄임말로 중국인 아나키스트들이 즐겨 쓰던 용어였습니다. 즉 ’삼무‘란 ’무정부‘ ’무종교‘ ’무가정‘을 의미하고, ’이각‘은 “각자 능력에 따라 일하고 각자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아나키스트의 강령 구절입니다. 단주 선생은 무정부주의자이자 무가정주의로 일관한 분입니다. 당신이 신봉한 대의와 원칙에 어긋난다고 판단하면 혈육의 정마저 가차없이 끊은 분이었다고 합니다. 가장인 사내는 바깥일에 나서기에 앞서 자신의 가정을 챙겨야 한다는 오늘날의 상식과 윤리에 비추어보면 실로 가혹하기 짝이 없는 신조였을 것입니다.

독립운동사 연구가들은 수많은 독립운동 지사들에 중에 특히 세 분의 강고한 원칙론자를 거론합니다. 단재 신채호, 심산 김창숙, 그리고 단주 유림선생을 꼽는다고 합니다. 신채호, 김창숙, 두 분 선배는 단주선생에게 정치철학적 개안과 인격적 감화를 주신 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민족사학의 거목, 신채호 선생의 일화는 단주 선생과 유사합니다. 북경 망명 중에 맞은 새 신부에게 혼인에 앞서 자신은 민족에 바친 몸이라 가정을 돌볼 수 없노라고 당당하게 선언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일찍 작고한 형의 딸이 친일파 집안에 시집간다는 소식을 듣고 삼엄한 경찰의 감시를 뚫고 귀국하여 설득에 나섭니다. 그러나 질녀가 뜻을 바꾸지 않자 즉시 의절하고, 그 징표로 당신 자신의 손가락을 잘랐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선생은 소설, ‘꿈하늘’(1916)에서 ”적국 일본의 놈, 년에 시집가거나 장가 들면 지옥에서 불칼로 그 반신(半身)을 끊는다“고 했습니다. 일본 지배자들은‘일본(內地)인과 조선(朝鮮)인 사이의 사랑’을 불순하게 이용하려고 했고. 민족주의적 저항 세력은‘적국놈년’과의 사랑을 민족에 대한 배신으로 여겼습니다. 1931년 12월 한 기자가 어렵사리 뤼순 감옥의 단재선생을 면회하고. 부탁할 것이 있느냐는 질문에 「국조보감 (國朝寶鑑)」과 「조야집요(朝野輯要)」 그리고 에스페란토어 원문 책자와 자전(字典)을 차입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합니다. 옥중에서도 민족의 역사와 함께 세계인의 공용어, 아나키스트의 공식 언어인 에스페란토어를 연마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단주 유림선생께서도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아들이 중병을 앓고 있어 석방해 줄테니 독립운동을 그만 두고 가정을 보살피라는 당국의 회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고 합니다. 한국 근대문학의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가 ’가장의 부재‘라고 합니다. 아버지가 만주벌판 아니면 일제 감옥에서 조국과 민족의 대의를 위해 헌신할 때, 뒤에 남은 가족의 부양은 강인한 여성의 몫이었습니다. 장한 어머니는 아들을 나라에 바치는 일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1909년 10 26일, 민족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옥중의 아들에게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라.”는 편지를 보냈답니다.

단주선생께서 집을 떠나 민족 대의를 위한 장정에 나섰을 때 뒤에 남은 가족은 어떻게 연명해야 했겠습니까? 선생께서 생계 때문에 적국 일본에 정면으로 맞서지 못한 부인과 아드님을 그토록 매정하게 대한 숭고한 결기를 존경하면서도, 그로 인해 가족이 겪어야 했던 남다른 고충에 대해서도 따뜻한 위로의 말씀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이토록 특별한 조부와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정신적 짐을 지고 격동의 세월을 살아 넘긴 유능희선생님의 의연한 자세에 경의를 표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선 우리는 너무나 익숙했던 한 분의 얼굴을 그리워 합니다. 언제나 자애로운 표정으로 이 자리에 함께 계시던 유세희 선생님을 이 이상 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양심과 균형감을 함께 갖춘 학자로서, 그리고 후손으로서 종조부 단주선생의 추모 사업에 헌신하신 유선생님의 공헌을 기리면서 삼가 묵념을 올립니다.

”어느 정치학자의 80년 회고“라는 부제를 단 유교수님의 유작, 「남남(南南)갈등의 한국정치」에는 종조부인 단주 선생님과 단주 선생님의 아드님이신 저자의 재종숙부, 유원식 장군에 대한 기억의 편린도 치우침 없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시 한번 유세희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마지막으로 해마다 이 소중한 모임을 열어주시는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와 유족분들 그리고 강북구청 관계자여러분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내년 이 자리에서는 보다 밝은 봄소식을 나눌 수 있기 되기를 간절히 빌면서 추도사를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2025년(乙巳) 4월 1일, 안경환 삼가 올림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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