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의 정치논단


05 김영천의 아나키즘 정치논단


이재명 전 성남시장의 여순병란 역사 왜곡 비판 2

 350명의 무장대가 12개 경찰지서와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를 습격했다. 이후 1954년 9월 21일 한라산 금족 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 전역에서 좌익과 우익의 상호 보복이 이어졌다. 약 2만 5천 명에서 3만 명가량 희생된 것으로 파악된다. 1948년 4월 28일 김익렬 제주 지구 담당 9연대장과 김달삼 유격대 사령관의 평화협정이 있었다. 그러나 5월 1일 오전 9시 오라리 연미마을에서 희생당한 우익 인사 부인의 장례식이 끝난 뒤, 좌익에 대한 보복으로 10여 채에 달하는 가구의 방화가 있었다. 제주도 경찰과 우익이 김익렬 연대장의 협상에 불만을 표시한 사건이다.

 

 경찰 개편과 우익세력 배제뿐만 아니라 무장습격한 핵심 공산주의자의 탈출을 인정하겠다는 협상 내용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았으며 공산주의 전략에 말려든 행위였다. 즉 그의 행동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오판이었다. 훗날 그는 제주도에 공산주의자가 없었다며 자신의 행동을 자찬하는 글을 남겼는데, 이로써 그의 인식이 단순했음이 드러났다. 김익렬의 후임으로 5월 15일 부임한 박진경 연대장은 미 군정의 방침에 따라, 진압 작전을 펼쳐 약 6백여 명을 체포했다. 이때 20여 명 남짓 무장대 혐의의 인원이 사살되었다. 하지만 6월 18일 그는 남로당 군 세포에게 암살당했다.

 

 당시 박진경 연대장은 강경 진압을 내세웠지만, 선무공작 위주로 무장대와 양민을 분리시키는 양동작전을 펼쳤다. 산하 소대장으로 활동한 채명신은 체포 숫자에 비해 사상자가 적었음을 증언했다. 훗날 베트남전 당시 주월남 한국군사령관을 역임한 그는, 무장 공산주의자와 민간인의 분별 처리라는 자신의 전술 근거가 박진경 연대장으로부터라고 밝혔다. 5월 10일 제헌의회 선거는 투표수 과반 미달로 무효 처리되었고, 6월 23일 재선거 시도 역시 실패하였다. 11월 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내려진 다음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되었으며, 1949년 5월 10일 비로소 재선거가 이뤄졌다.

 

 여수와 순천의 군사반란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14연대가, 제주 4·3사태 진압 출동 명령에 반발해 일으킨 사건이다. 14연대에 속한 남로당 당원들이 동족 살상 반대와 통일 정부 수립을 내세우며 무장궐기하자, 인근 좌익과 동조 세력들도 호응했다. 사건의 발발 확산과 진압 과정에서 2천여 명에서 5천여 명 정도로 추정되는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지창수를 중심으로 하는 ‘남로당 병사 소비에트’ 주도의 이 병란은 10월 27일 마무리되었으며, 일부 잔여 세력은 지리산으로 들어가 6·25동란이 일어날 때까지 근처 지역을 넘나들며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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