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동란 이전의 구빨치산들은 아나키스트의 대중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방해 공작과 살상 공격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전국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했던, 경남 안의 아나키스트에게 이들의 암살 행위와 공격이 집중되었다. 이곳 아나키즘의 중심인물인 하종현도 결국 살해당했다. 그는 일제 시기 ‘안의 남선물산주식회사’를 조직해 아나키즘 협동조합운동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안의중학교 설립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즘 분쇄를 위하여 이진언 이시우 하종진 등 쟁쟁한 아나키스트의 살해까지 시도하였다.
제주 4·3사태와 여순병란은 남한 제헌의회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한 공산주의자의 소요이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따랐다. 공권력과 공산주의자의 분별 없는 상호 보복행위로 인해, 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인의 대량 살상이 있었다. 국가 공권력의 사과는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가 참혹했다는 이재명 전 성남시장의 여순병란에 대한 표현은,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왜곡을 의도한 것이다. 반란의 주모자들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해방정국 공산주의자의 상투적인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여순병란의 가장 큰 발생 이유인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압 명령 거부는, 사태의 전개 과정과 원인 및 책임 소재에 대한 이해를 몰각한 자가당착의 억지 논리이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공산당의 주장은, 북한에 단독정부가 먼저 수립된 현실을 호도하는 기만이었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의 공산주의자들은, 미군 철수와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무장궐기라는 수단을 택한 것이다. 당시 아나키즘 진영의 태도와 대비되는 아전인수의 모순된 주장이었다. 해방정국 아나키즘 진영은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세우며, 남북한의 미 군정과 소련 군정을 모두 비판했다.
소련 군정의 적극 지원에 의해 공산당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사실상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남한 지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미 군정의 엄호를 배경으로 하는 이승만과 그 계열의 득세를 비판했고, 제헌의회 참여를 거부했다. 아울러 김일성 주도의 평양회담도 공산주의자의 선전 선동에 불과하기에 서울회담을 역설 제의하였다. 독립운동 시기에 함께 일제와 투쟁하였던 김구 김규식 등의 평양행을, 유림과 아나키즘 진영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라며 비판한 뒤 이들과 결별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혁명 당시부터 공산주의 독재의 본질을 꿰뚫었다.
6·25동란 이전의 구빨치산들은 아나키스트의 대중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해, 방해 공작과 살상 공격을 전개하였다. 해방 직후인 1946년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전국아나키스트대회를 개최했던, 경남 안의 아나키스트에게 이들의 암살 행위와 공격이 집중되었다. 이곳 아나키즘의 중심인물인 하종현도 결국 살해당했다. 그는 일제 시기 ‘안의 남선물산주식회사’를 조직해 아나키즘 협동조합운동을 이끌었고, 이를 바탕으로 안의중학교 설립에도 핵심 역할을 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아나키즘 분쇄를 위하여 이진언 이시우 하종진 등 쟁쟁한 아나키스트의 살해까지 시도하였다.
제주 4·3사태와 여순병란은 남한 제헌의회 선거와 정부 수립을 반대한 공산주의자의 소요이며, 그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의 희생이 따랐다. 공권력과 공산주의자의 분별 없는 상호 보복행위로 인해, 사태와 직접 관련이 없는 민간인의 대량 살상이 있었다. 국가 공권력의 사과는 바로 이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부당한 명령에 맞선 결과가 참혹했다는 이재명 전 성남시장의 여순병란에 대한 표현은, 사건의 맥락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왜곡을 의도한 것이다. 반란의 주모자들이 정당했다는 주장은, 해방정국 공산주의자의 상투적인 표현을 그대로 인용한 것에 불과하다.
여순병란의 가장 큰 발생 이유인 제주 4·3사태에 대한 진압 명령 거부는, 사태의 전개 과정과 원인 및 책임 소재에 대한 이해를 몰각한 자가당착의 억지 논리이다. 단독정부 수립 반대라는 공산당의 주장은, 북한에 단독정부가 먼저 수립된 현실을 호도하는 기만이었다. 제주도와 여수 순천의 공산주의자들은, 미군 철수와 공산주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무장궐기라는 수단을 택한 것이다. 당시 아나키즘 진영의 태도와 대비되는 아전인수의 모순된 주장이었다. 해방정국 아나키즘 진영은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내세우며, 남북한의 미 군정과 소련 군정을 모두 비판했다.
소련 군정의 적극 지원에 의해 공산당의 주도권을 확립하고 사실상 단독정부를 먼저 수립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은, 남한 지역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미 군정의 엄호를 배경으로 하는 이승만과 그 계열의 득세를 비판했고, 제헌의회 참여를 거부했다. 아울러 김일성 주도의 평양회담도 공산주의자의 선전 선동에 불과하기에 서울회담을 역설 제의하였다. 독립운동 시기에 함께 일제와 투쟁하였던 김구 김규식 등의 평양행을, 유림과 아나키즘 진영은 사려 깊지 못한 행동이라며 비판한 뒤 이들과 결별하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러시아혁명 당시부터 공산주의 독재의 본질을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