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의 정치논단


05 김영천의 아나키즘 정치논단


이재명 전 성남시장의 여순병란 역사 왜곡 비판 4

 단독정부 수립 반대를 명분으로 내세운 제주도 무장습격은, 아나키스트가 볼 때 궤변에 불과하다. 김일성과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소련 군정 기획으로, 1946년 2월 22일 사실상의 정부로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설립해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에 나섰다. 토지개혁은 그해 3월 5일 북조선 토지개혁에 대한 법령으로, 3월 말까지 토지 매수를 완료하였다. 화폐개혁 역시 북조선인민위원회 법령 30호에 근거해, 1947년 12월 6일에서 12일까지 전격 시행되었다. 행정 입법 사법까지 장악했던 실질 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1947년 2월 22일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되었다.

 

 한국 현대사의 왜곡은 우리의 힘으로 해방을 맞지 못했기 때문이다. 친일파의 단죄는 가장 우선해야 할 국가 과제였다. 그러나 미 군정과 이승만이 오히려 이들을 군정과 정부 수립에 적극 활용했다. 나아가 친일파는 김일성의 6·25 남침으로 인해 기사회생의 명분을 확보했다. 즉 공산당의 침공으로부터 그들이 국가를 지켜낸 곤혹스런 상황이 전개되었다. 일본군 복무를 한 백선엽은 군대 내부의 공산주의자 색출에 성과를 거두었고, 낙동강 전선 다부동에서 전세 역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에 대한 좌파의 과도한 공격은, 김일성과 공산당의 6·25동란 책임을 희석시키려는 의도이다.

 

 아울러 제주 4·3사태 관련 인물인 김익렬에 대한 좌파 진영의 지나친 긍정 평가와, 박진경의 진압 작전이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켰다는 부정적인 주장도 적절한 인식이 아니다. 사상 검증이 허술했던 미 군정 시기 공산당 세포들은 군 내부로 침투했다. 제주와 여수 순천을 잇는 공산주의자들의 무장공격이 역으로 남한 군대의 좌파 숙군으로 이어졌다. 박정희의 군대 내 남로당 조직 토설과 이에 따른 백선엽의 박정희 구명은, 군대에서 암약하던 공산주의자 척결 정군으로 이어졌다. 친일파의 득세에는 이승만뿐만 아니라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의 남침 과오가 결정적으로 역할을 했다.

 

 해방정국 아나키스트들은 어떤 체제의 나라를 세울 것인가를 고민했다. 러시아혁명 이래 극좌 공산 독재와 아나키스트는 어울릴 수 없었다. 또 극우 파시즘 독재와도 아나키스트는 정반대에 위치한다. 자율정부주의가 한국 아나키스트들의 집약된 의지이다. 이를 위해 민주공화정, 즉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북한의 아나키스트들이 공산 독재를 피해 남한으로 내려온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가능성 때문이었다. 남북한의 부조리한 체제를 극복하고 더 나은 사회를 지향하기 위해, 아나키즘은 여전히 유효한 최선의 이데올로기이다.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08793) 서울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956, 302호  |  1956, Nambusunhwan-ro, Gwanak-gu, Seoul, Republic of Korea

TEL : 02-838-5296  |  관리자메일 : kaone@kaone.co.kr

COPYRIGHT ⓒ  Danju Yurim Memorial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ENOUGHM]

단주유림선생기념사업회  (08793) 서시 관악구 남부순환로 1956, 302호  |  1956, Nambusunhwan-ro, Gwanak-gu, Seoul, Republic of Korea

TEL : 02-838-5296  |  관리자메일 : kaone@kaone.co.kr

COPYRIGHT ⓒ  Danju Yurim Memorial Foundation.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ENOUGH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