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좌진>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보복으로 경신참변이 전개된 뒤, 김좌진 부대는 노령으로 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당국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연해주의 이만에서 철수하여 1922년 만주로 귀환했다. 1929년 3월 김좌진과 유림은 북만주 해림에서 독립운동의 노선 정립을 두고 토론하였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면, 그보다 더욱 진보된 사상인 아나키즘을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 논쟁을 통해서 김좌진은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는 1929년 7월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며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아나키즘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려고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김좌진을 살해하였다.
<이청천>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코민테른극동비서부와 이르크츠파공산당이 주도한 자유대대 중심의 한인독립군 부대 개편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1922년 4월 그는 이 학교의 교육 내용이 소련 당국의 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즉 볼셰비키의 노선이 아니라 한국의 민족해방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9월 쌍성보, 12월 경박호, 1933년 4월 사도하자, 7월 동경성과 대전자령에서 한중 연대의 대규모 항일투쟁을 펼쳐 승리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으로 취임했고, 미군과 연합작전 준비 중 해방을 맞았다.
<홍범도>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의 대승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1921년 2월 노령으로 이동했다. 그해 6월 자유시사변 다음 이청천과 함께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및 이르크츠파공산당이 주도한 자유대대 중심의 한인독립군부대 개편에 참여했다. 그와 이청천이 자유시사변 당시 행적은 유사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에서 대조된다. 1923년 김창수와 김오남이 그를 배신자라며 피습했다. 이들은 자유시사변 당시 무장해제되었던 사할린부대 출신이다. 홍범도는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인들의 희생이 컸으나 그가 저항한 흔적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는 1943년 이주했던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이범석>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승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김좌진과 함께 노령 연해주로 갔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우리의 무장 독립군대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볼세비키와 사실상 그 산하 자치 권력인 극동공화국의 총기 무장해제 요구는, 한인독립군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이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이를 수용하지 않고 북만주로 되돌아왔다. 1934년 10월 이범석은 낙양군관학교 한적군관대장을 맡아 한인 군사간부를 양성하였고, 이청천은 지도원으로서 활동했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하며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4월 미국전략공작국(OSS)와 연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일제가 패망했다.
<김좌진>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보복으로 경신참변이 전개된 뒤, 김좌진 부대는 노령으로 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당국이 무장해제를 요구하자 연해주의 이만에서 철수하여 1922년 만주로 귀환했다. 1929년 3월 김좌진과 유림은 북만주 해림에서 독립운동의 노선 정립을 두고 토론하였다. 유림은 “공산주의에 대항해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하려면, 그보다 더욱 진보된 사상인 아나키즘을 수용해야 한다.”고 역설했는데, 이 논쟁을 통해서 김좌진은 아나키즘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그는 1929년 7월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하며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했다. 아나키즘의 세력 확대를 저지하려고 공산주의자들이 1930년 1월 김좌진을 살해하였다.
<이청천>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이후, 코민테른극동비서부와 이르크츠파공산당이 주도한 자유대대 중심의 한인독립군 부대 개편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고려혁명군관학교의 교장에 취임하였다. 하지만 1922년 4월 그는 이 학교의 교육 내용이 소련 당국의 방침과 다르다는 이유로 체포당했다. 즉 볼셰비키의 노선이 아니라 한국의 민족해방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같은 해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 노력으로 석방되었다. 1932년 9월 쌍성보, 12월 경박호, 1933년 4월 사도하자, 7월 동경성과 대전자령에서 한중 연대의 대규모 항일투쟁을 펼쳐 승리했다. 1940년 9월 임시정부 광복군 총사령으로 취임했고, 미군과 연합작전 준비 중 해방을 맞았다.
<홍범도>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의 대승 후 일제의 추격을 피해 1921년 2월 노령으로 이동했다. 그해 6월 자유시사변 다음 이청천과 함께 코민테른 극동비서부 및 이르크츠파공산당이 주도한 자유대대 중심의 한인독립군부대 개편에 참여했다. 그와 이청천이 자유시사변 당시 행적은 유사하지만 그 이후의 활동에서 대조된다. 1923년 김창수와 김오남이 그를 배신자라며 피습했다. 이들은 자유시사변 당시 무장해제되었던 사할린부대 출신이다. 홍범도는 1927년 소련공산당에 입당했고,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으로 한인들의 희생이 컸으나 그가 저항한 흔적은 파악되지 않는다. 그는 1943년 이주했던 카자흐스탄에서 사망했다.
<이범석>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승리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김좌진과 함께 노령 연해주로 갔다. 그러나 현지 상황은 우리의 무장 독립군대에 대해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볼세비키와 사실상 그 산하 자치 권력인 극동공화국의 총기 무장해제 요구는, 한인독립군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도였다. 이범석은 김좌진과 함께 이를 수용하지 않고 북만주로 되돌아왔다. 1934년 10월 이범석은 낙양군관학교 한적군관대장을 맡아 한인 군사간부를 양성하였고, 이청천은 지도원으로서 활동했다. 1940년 9월 광복군을 창설하며 참모장으로 취임하였다. 1945년 4월 미국전략공작국(OSS)와 연대, 국내진공작전을 준비하던 중에 일제가 패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