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의 정치논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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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사 교정 내 독립운동가 5인의 흉상은 2018년 문재인 정권 당시 설치되었을 때, 여론이나 육사 내부의 수렴 과정 없이 정권의 홍보행사로 갑자기 진행되었다. 물론 이들은 공훈이 뚜렷하고 전 국민에게 귀감되는 독립운동가들이다. 그러나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의 국가관과 정체성에 귀감이 되는 대상 선정은 심사숙고해야 할 일이었다. 일제에 의해 고문 치사당한 이회영과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된 김좌진은 아나키즘 계열의 인물로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청천과 이범석은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자로서 제1공화국에서의 행적에 대해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그러나 일제 패망 시까지 항일운동을 지속했으므로 이들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다만 홍범도는 자유시사변 이후 소련공산당 입당과 일부 활동이 지적된다. 1921년 6월 노령의 자유시사변은, 일본과 볼세비키의 이해가 맞아 전개된 참변이었다. 연해주에 주둔한 일본군은 극동공화국에게 한인 독립군을 압박하도록 요구했다. 1920년 4월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일종의 완충국가로 설립된 극동공화국은, 볼세비키 영향 아래에 있던 연합정권의 괴뢰국가였다. 1918년 4월 일본군은 백계 러시아군을 지원하고 영토 확보를 위해 연해주에 진주했다. 볼세비키와 극동공화국은 일본군을 철수시키기 위해 그 요구를 수용했다. 즉 한인무장 병력을 개편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면서, 짜르체제 세력인 백계 러시아군과의 내전에 이용하려 했다.
한편 연해주를 기반으로 하는 공산계열 무장한인 부대는, 크게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사할린부대와 이르크츠파 고려공산당의 자유대대로 나뉘었다. 이들은 각각 러시아공산당 극동국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원을 받아, 한인 무장부대의 주도권을 잡으려 했다. 이 당시 만주에서 이동한 민족주의 계열 무장세력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이동하였기에, 연해주 한인부대의 상황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21년 1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설립은 현지 권력의 향배를 가르는 분기점이었다. 이 부서의 지원을 받은 이르크츠파가 무장부대 통합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따라서 연해주에 집결한 독립군의 개편을 위해 먼저 나섰던 상해파의 입지는 좁아졌다.
결국 극동공화국 부대와 이르크츠파 자유대대는 사할린부대를 비롯한 여타 독립군에게 무장해제를 요구했다. 이에 응하지 않은 사할린부대와 만주에서 이동한 허재욱의 의군부가 공격을 받았다.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한인 사망자는 익사자 포함 100여 명 실종 60명 무장해제 900여 명으로 알려졌다. 이 참변으로 인해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은 심화되었고, 볼세비키에 대한 인식도 이념에 따라 갈렸다. 사할린부대의 민간인 학살 전력 및 무장 독립군과 현지인의 마찰을 부각시키는 주장도 있다. 이 때문에 볼세비키와 극동공화국의 조치가 타당하다는 견해이다. 하지만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큰 흐름을 도외시하고, 부분 상황에 매몰된 협소한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