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천의 정치논단


05 김영천의 아나키즘 정치논단


육군사관학교 교정의 독립운동가 흉상에 관한 고찰과 대책 5

 홍범도가 사할린부대의 입장에 섰다가 자유대대 진영으로 옮긴 것은, 코민테른을 통한 볼세비키의 최종 의사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현지 권력과 대립하기 힘든 처지의 망명객이기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 점은 이청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진압 과정에 홍범도와 이청천이 개입했는지 여부가 사료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노령에 기반한 현지인이 아니므로 직접 작전에 참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사할린부대는 무장해제당한 뒤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때 홍범도가 재판위원 명단에 올려졌는데, 자유대대의 학살을 용인했다기보다는 피해를 줄이기 위한 조정 역할의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우리 독립군의 입장에서 무장해제는 존재 이유의 폐기였다.

 

 전개 과정과 배경이 간단치 않지만, 자유시사변의 가해자는 볼세비키와 이에 동조한 이르크츠파 고려공산당 자유대대이다. 이 사건으로 급속하게 축소되어 가던 우리의 무장 항일독립운동 역량이 더욱 쇠퇴하였다. 식민지 민족해방을 원조한다는 코민테른 방침의 이면에는, 사회주의혁명의 옹위라는 미명 아래 러시아 우선 슬라브민족주의라는 전제가 있었다. 민족해방운동 관점에서 홍범도의 만년 행적은 아쉬움이 남는다. 물론 그가 해방 전에 사망했으므로, 북한 정부 수립에 참여했고 6.25남침에도 책임 있는 김원봉과는 구별된다. 단지 우리는 이청천과 홍범도가 자유시사변 당시 비슷한 궤적을 보였으나, 이후의 활동이 현저하게 대조되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청전은 볼세비키 노선에 반대하다가 체포되었고 만주로 돌아와 무장 투쟁을 이어갔다. 그러나 홍범도는  사변 이후 사실상 민족해방운동을 진전시키지 않았다. 나아가 볼세비키에 입당한 다음부터는 봉오동전투나 청산리전투 같은 무장 항일투쟁과 거리가 멀었다. 공산당 입당이 생활의 방편이라든가, 소비에트연방이 제2차세계대전 연합국의 일원이기에 큰 차원에서 항일운동의 연장이라는 주장은 옹색한 변명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주장대로 홍범도의 소련공산당 입당이 당시 불가피했던 시대 상황이라는 논리는, 독립운동사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국민 대중의 공산당 거부의식을 희석시키려는, 소비에트체제 용인을 의도하는 준비된 왜곡이다.

 

 1921년 5월 자유시사변 직전 이회영과 만난 조소앙은, 러시아혁명으로 들어선 소비에트 독재체제가 끼니를 고루 나눠주는 감옥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볼세비키 소비에트정권에 대한 냉철한 인식이었다. 한편 1919년 3월 아나키스트 농민운동가 네스토르 마흐노와 그의 농민부대는, 레닌의 볼세비키와 연합군사작전을 체결하고 짜르 전제주의 백군 세력에 대항해 흑적 연합전선을 펼쳤다. 그러나 내전의 승리를 확신한 적색 군대가, 1920년 11월 협정을 폐기하고 돌연 흑색 농민부대를 공격했다. 공산주의가 아나키즘을 배신함으로써 러시아혁명의 대의는 무너졌다. 1991년 12월 소비에트연방체제가 붕괴될 때까지 인권 유린의 공산당 독재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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